다문화 가정의 우상 이자스민 씨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너는 필리핀 피와 한국인 피를 갖고 있어 더 좋은 거야.' 아이는 '우리 엄마는 필리핀 사람이야.' 자랑하고 다녔어요. 자신이 남보다 특별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필리핀 이주 여성 이자스민 씨는 아파트 단지의 젊은 주부끼리 하는 '생활밀착형' 수다를 떤다.
"집에서는 아이를 이렇게 길렀지만 제가 학교엔 안 찾아갔어요. 급식·청소·학부모 총회·안전둥지회·녹색어머니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시어머니, 남편, 시동생이 대신 갔어요. 학교 왕따 얘기가 나오는데 내가 가면 그렇잖아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들이 '친구들에게 엄마 자랑을 해놨는데 이번 배식에는 무조건 나오라.'고 했어요. 아들은 자신감이 있는데 막상 내가 주눅이 들었어요."
"학교 급식실에서 저를 보자 엄마들이 '외국인이다. 원어민 선생님인가?'라고 했어요. 그땐 기분이 좋았어요. 제가 가방을 열어 앞치마를 두르니 '아니야, 도우미 아줌마를 불렀나 봐.' 했어요. 창피했어요.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아이들이 몰려와 '피부가 왜 까매요, 아프리카 말 한번 해봐요.' 했어요. 우리 아들에게 상처가 되겠다 했는데, 아들은 자랑스럽게 '야, 우리 엄마야. 엄마 영어를 한번 해봐, 필리핀 말도 해봐.' 하는 거에요."
―1남 1녀로 알고 있는데, 딸은요?
"아들은 요즘 말로 '쿨' 한데, 딸내미는 내성적이에요. 피부가 저보다 더 까맣고. 어릴 때 학교 친구들이 '필리핀에는 바나나가 많지, 너희는 원숭이 족이냐?'며 놀려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자녀에게는 필리핀어를 가르쳤나요?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여기서 살려면 한국어부터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공짜로 다니는 학원도 없었어요. 연세대 어학당에는 석 달에 2,500달러를 받았어요. 우리 형편으론 어림없었어요. 저 혼자서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한 문장씩 내가 공부한 것을 아들에게 가르쳤어요. 모자가 같이 한국어를 배운 거죠."
―필리핀 국립 의대 재학 중인 1994년 외항선 선원인 남편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남편이 필리핀 디바오에 있는 우리 가게에 음료수를 사러 들어왔어요. 그때 반한 거에요. 주말에는 제가 가게를 봤거든요."
―낯선 외국인인데 첫눈에 반할 수 있나요?
"반한 사람은 제가 아니고 남편이에요. 저는 대학 1학년이었고, '어떤 아저씨가 음료수 사러왔나 봐' 생각했을 뿐이죠. 남편과는 띠동갑이었어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요?
"음료수를 사고 간 뒤 또 사탕 사러 오고 맥주 사러 오고, 2박 3일 체류 동안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어요. 마지막에 제 이름과 가게 주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어요. 떠난 뒤로 일주일에 한 번꼴로 편지를 보냈어요. 그냥 펜팔로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6개월쯤 지나 '휴가 때 필리핀에 놀러오겠다.'고 했어요. 내가 공항에 마중 나가는 것도 아니니 오면 오는가 했어요."
―남편의 '연정'을 못 알아챘나요?
"2주일 머물고, 떠날 때 제가 공항까지 배웅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제가 다니는 대학 앞에 서 있는 거에요. 깜짝 놀라 '어떻게 됐느냐?' 하니 한국에 도착해서 잠을 설치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겁니다. 하루 만에 갔다가 다시 온 거에요. 그 뒤로 2주 간격으로 왔다갔다했어요. 어느 날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들고 와서는 '결혼할 때까지 여기서 있겠다. 불법 체류가 돼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넘어갑니까?
"그러면 안 넘어갈 여자가 없어요."
―19세의 나이에 외국인과 결혼해 낯선 땅에서 사는 두려움은 없었나요?
"필리핀에서 살겠다는 약속을 받았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해야 하니까요. 남편은 택시 몇 대를 사서 운송사업을 할 작정이었어요."
―교제한 지 1년도 안 돼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시댁에선 아무도 안 왔다면서요.
"식장에선 혼자인 남편이 안 돼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결혼해야 하나 마음이 들었지만…'난 그쪽 집안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과 결혼하는 거야.' 했어요. 그때는 한국 문화를 잘 몰랐죠. 집안과 결혼한다는 것을."
―결혼한 뒤 한국에 처음 들어와 보니 어땠나요?
"연애할 때 남편이 한국어 책과 역사책을 보내줬어요. 그걸로 한국어를 쓰고 읽는 걸 배웠어요. 김포공항에 내리니 한국어 간판이 다 읽히는 게 신기했어요. 한국이 잘 사는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 서울 풍경은 그렇다 쳐도, 막상 시댁 살림은?
"시부모님은 세탁소를 했는데 그 건물 지하에 살림집이 있었어요. 지하라서 된장·고추장·김치 냄새가 심했어요. 거실도 없고. 안방에 모여 밥을 먹었어요. 상을 왜 두 개 차리는지 처음엔 이해가 안 됐어요. 시할머니와 시아버지·남편·시동생이 한 상, 저와 시어머니가 다른 상에 앉았어요. 왜 우리는 메인 테이블이 아닌 보조 테이블이냐 궁금했어요."
―시댁에는 시할머니·시부모·시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면서요?
"처음엔 시댁 식구와는 말이 안 통하니 눈이 마주치면 웃기만 했어요. 저는 인사하러 온 것이니,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최대한 잘 해 드려야겠다고만 생각했어요."
―어떻게 눌러앉게 됐나요?
"남편이 비자 만료기간인 3개월까지 있자고 했어요. 필리핀의 남편과 서울의 남편이 달라 보였어요. 필리핀에서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먹고, 서울에서는 진짜 맛있게 먹어요. 필리핀에서는 남들과 말이 별로 없었지만 여기서는 유쾌하고 행복해 보였어요. 이 사람은 여기에 있어야 하는구나 생각을 했어요. 비자가 만료될 즈음 저 혼자 필리핀으로 돌아갔어요. 학교를 마쳐야 하니까요. 남편이 곧 뒤따라 들어오기로 했는데, 제가 임신을 한 거에요. 아이를 한국에서 낳자고 해서 다시 들어왔어요. 그때부터 정말 한국에서 살게 됐어요."
―시집살이가 잘 적응이 됐나요?
"다들 '어려울 것이다.'고 지레짐작해요. '시' 자는 다 어려우니. 남편이 '같이 산다.'는 말을 했지 '모신다.', '떠받들어야 한다.'는 말은 안 했어요. 저는 아이 키우며 제 할 일을 하는 거죠. 할머니가 계시니까 어머니도 집안일에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너희가 나를 모셨나? 내가 너희를 모셨다.'고 했어요."
―같이 살면서 솔직히 무엇이 어려웠나요?
"제가 한국말을 잘못 알아들어 '네?' 하면 어른들은 제 귀가 어두워 그런가 생각하나 봐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목소리가 한 옥타브씩 올라가요. 혼나는 느낌이죠. 말보다 빨리 느는 것은 눈치예요. 눈치가 그냥 단이 아니라 구 단이 돼요. 어머니가 어떤 말씀을 하면 무슨 뜻인지 몰라도 척척 해내요. 그렇게 하려니 머리가 너무 바빠요."
―언제부터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었나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한 달쯤 지나니 별로 불편이 없었대요. 첫 아이를 낳고는 동네 가게에 심부름하러 다녔으니까요."
―바깥에서 차별받은 적은 없었나요?
"그때는 이주 여성이 별로 없었고, 저를 유학생쯤 생각했어요. 결혼했다고 하면 다들 경악했어요. 음식점에 가서 메뉴판을 읽으면 '아이고 귀여워. 나는 미국에 살았는데도 영어 못하는데 너는 얼마 살았다고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나.' 했어요. 한국에서 이주 여성이 많아지고 난 뒤로 인식이 나빠졌어요. 중국분들이 결혼해서 도망가고, 돈 벌러 오기 위해 거짓 결혼하면서 안 좋은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요."
―이제 이주 여성들로부터 '언니는 우리의 우상이야. 어떻게 하면 우리도 언니처럼 돼?'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면서요.
"저는 올 때 '얼마 있을지 모르니 같이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자.'며 마음 편하게 왔어요. 한국에 시집와서 '언제면 친정에 갈 수 있나?'고 매였으면 힘들었을 거에요. '시어머님이 너무 간섭한다.'고들 불평하는데 '너무 잘 챙겨준다.'고 생각해봐요. 무슨 일을 하든 자신감이 중요해요. 나를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엄마가 이걸 한다는 걸 보여줘야 해요. 아이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겁니다."
―방송을 탄 것은 2005년 '외국인 주부가요열창에 출연하면서였지요. 어떻게 출연 생각을 했나요?
"명절 때마다 그런 프로가 나오잖아요. 집안 친지들이 '우리 집안에도 외국인 며느리 있는데 한 번 안 나오나?'라는 거에요. 앞에서는 '아이, 못해요.' 했지만 어느 날 제가 예심 신청을 하고 혼자서 방송국에 갔어요."
그녀는 본선에서 입상은 못 했으나 4대가 함께 사는 집의 며느리라는 게 화제가 돼 방송 출연이 계속 들어왔다. 방송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 한국어 강사, 정부 부처 강연, 영화 '의형제', '완득이' 출연까지 이어졌다.
―본인의 연기 실력은?
"저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지 연기는 못 해요. 오디션을 볼 때 '감정을 실어 편지를 읽어보라.'고 했어요. 제가 읽은 걸 듣고 감독님이 두 번이나 눈물을 보였어요. 남편은 늘 '당신은 머리도 빨리 잘 돌아가고 이해도 깊다. 당신만한 여자가 없다.'며 자신감을 심어줬어요. 그런 팔불출이 없었어요."
남편은 2010년 여름 휴가지에서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그녀는 한 달 동안 방안에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개학하는데 아이들이 바리바리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딸애는 부엌에서 달걀 프라이를 부치고 있고, 아들은 울적하게 교복을 입고 있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사는 사람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댁과는 언제부터 독립해 살았어요?
"지금도 같이 살아요."
―함께 살면 재혼하기 어려울 텐데.
"시어머니가 더 화끈하세요. '너는 내 딸과 같으니 좋은 자리 있으면 딴생각 말고 가라. 어차피 친정이 여기야. 너는 아직 젊어. 너 나이 때 아직 결혼 안 한 사람들도 많아.'라고 말씀해요. 결혼은 한번 했으면 됐지, 결혼한 사람 중에도 어떻게 하면 이 결혼생활에서 빠져나가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연고가 없어진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안 했나요?
"전혀 생각 안 했어요. 다들 '언제 필리핀에 돌아가?' 물었어요. 그게 당연한 것처럼."
―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저는 필리핀에 돌아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제 국적은 한국이고요. 우리 아이들은 한국 사람이고요. 제 집이 있고 시부모가 있어요. 여기에 오게 된 이유가 남편이지만 제가 어른이 되는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어요. 19세에 와서 35세가 되도록 살았으니. 제가 배우고 아는 사회가 한국 사회이고, 제 삶이 여기에 있어요."
Anak, Freddie Agui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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