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우 박사의 이별 편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아들아! 너희와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가 있단다. 여보!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시각장애인인 전 백악관 차관보 강영우 박사는 임종을 앞두고 아내와 두 아들에 편지를 남겼다.
강 박사는 지난해 10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차분하게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해왔고 가족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썼다.
최근 별세한 강 박사의 가족이 전한 편지는 그가 가족과 함께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회고하고 부인 석은옥 여사와 진석, 진영 두 아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빼곡히 담고 있다.
'이제 너희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로 시작되는 두 아들에 보내는 편지는 '내가 너희를 처음 품에 안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와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고 두 아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담았다.
그는 '하지만 너희가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와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라며 두 아들을 키우는 과정의 추억을 회고했다.
강 박사의 장남 진석 씨는 지난해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슈퍼 닥터'로 선정되기도 한 유명 안과 전문의이며, 차남 진영 씨는 백악관 선임법률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해 보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긴 채로 자라준 너희가 고맙고, 너희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특히 지난해 연말 췌장암 판정을 받은 후 손자들까지 모든 가족이 함께했던 크리스마스가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었다.'고 아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강 박사는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는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다. 나의 아들 진석,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다.'고 편지를 맺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부인에 보내는 편지는 젊은 시절 첫 만남부터 회상하며 시작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어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나에게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1962년 서울맹학교 학생이던 강 박사는 맹학교 자원봉사를 나왔던 당시 숙명여대 1학년이던 부인 석은옥 여사를 처음 만났다.
강 박사는 대학생 누나였던 석 여사의 도움으로 대학 진학의 꿈을 키웠고 1972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강 박사는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이라며 시각장애인인 자신과 결혼하고 보살펴준 부인의 헌신적인 삶을 떠올렸다.
미국 유학,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회상하며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느냐.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회한도 담았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강 박사가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라고 지칭한 부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는 말로 맺었다.
1944년 경기도 문호리에서 태어난 강 박사는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었고 같은 해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 10대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어려운 청소년기를 겪었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연세대를 졸업한 뒤 1972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 박사가 미국 유학 떠날 당시 문교부는 장애를 국외 유학의 결격사유로 규정했지만, 강 박사의 유학으로 이 조항이 폐지되면서 그는 한국 장애인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 후 일리노이대 교수와 일리노이주 특수교육국장 등을 역임하다.
지난 2001년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로 발탁됐다.
당시 강 박사의 백악관 차관보 발탁은 미국 이민 1백 년 한인 역사상 최고위 공직이었다.
그의 자서전 '빛은 내 가슴에'는 7개 국어로 번역 출간됐고, 국회 도서관에 음성도서(talking book)로 소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장애인 인권을 제도적으로 증진하기 위해 강 박사는 국제교육 재활교류재단을 창설했으며 유엔 세계 장애위원회의 부의장을 역임하며 루스벨트 장애인상 제정을 제안하고 창설하기도 했다.
Me t'aspro mou mantili (하얀 손수건)
Nana Mouskouri
단아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Nana Mouskouri는 1935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나 오페라 가수의 꿈을 꾸며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녀는 명문인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하게 된다.
그러나 음악원 졸업시험을 앞두고 우연히 접하게 된 재즈음악에 매료된 후 그녀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재즈뮤지션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포크와 샹송 등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다양한 팝 음악을 섭렵하며 제 2의 Maria Callas가 되는 것을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음악원을 졸업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지만 나나 무수쿠리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가수로 성장하게 된다.
번안 가요로 잘 알려진 '하얀 손수건’과 '아테네의 흰 장미’가 1960년 당시로는 경이로운 120만 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면서 나나 무수쿠리는 대형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그녀의 인기는 급속히 퍼져나갔고, 본격적인 성공은 미국 대중음악의 거목인 Harry Belafonte가 그녀를 정식으로 미국에 초청하면서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펼친 나나 무수쿠리와 해리 벨라폰테의 1964년 카네기 홀 실황은 성황을 이루었고 유럽에 이어 미국에서도 그녀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나나 무수쿠리는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전 세계에 걸친 그녀의 팬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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