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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길, 은희 y 불쌍한 남자 조선 왕

부에노(조운엽) 2013. 2. 2. 20:19

 

 

 

 

불쌍한 남자 조선 왕

 

 

 

옛날 왕은 예쁜 여자들을 거느리기 쉬웠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왕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천만에!'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취하기 쉬웠을 것이란 개념보다는 대학생이 되면 멋진 이성을 사귀기 쉬울 것이란 생각이 차라리 현실적일 것이다.

'왕은 본인이 원하면 예쁜 여성을 첩으로 삼을 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평균 3.7명의 후궁을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첩의 선택은 원칙적으로 왕실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금 본인이 여자를 고른다는 것은 원칙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대비나 중전 같은 왕실 여성들이 후궁을 선정했기 때문에, 남자 눈에 예쁜 여성이 후궁에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궁의 일차적 선정 기준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가'였다.

왕의 잠자리도 철저한 사전 기획 속에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여덟 명의 궁녀가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치러진 것이다.

그래서 왕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베드신을 찍는 배우가 쾌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은 중전이나 후궁과의 관계 속에서 남자의 행복을 느끼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만족을 충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왕이 예쁜 궁녀에게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왕실과 궁중과 조정이 집중하여 단속했기 때문이다.

 

 

 


승정원(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듯이, 왕의 동선은 철저하게 파악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궁녀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여간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계 톱스타가 기자들을 따돌리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게다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은 매일 두세 번씩 경연(세미나) 자리에서 왕의 귀에 '공자 왈, 맹자 왈'을 주입했다.

이때 가장 강조된 것이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야 한다.'는 구절이었다.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 사상이다.

신하들은 왕이 침실에 혼자 있을 때도 신독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아 자기 수양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례로, 중종 12년(1517년)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경연 자리에서 중종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시라고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광조는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게을리해서 이런 것 아닙니까?'라며 다그치기까지 했다.

침실에서 딴생각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막간다.'는 느낌이 드는 발언이었다.

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왕이 혹시라도 국가경영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까 봐 항상 경계하고 견제했다.

 

 

 


2003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막가는 대화를 했다.

평검사들의 발언 태도는, 내용의 당부당을 떠나, 누가 봐도 막가는 것이었다.

왕들은 항상 노무현처럼 작심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

공개석상에서 왕은 반말하고 신하들은 존댓말을 했지만, 가슴을 졸이는 쪽은 신하들이 아니라 왕이었다.

신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공손한 존댓말로 막가는 발언들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살려면, 이성에 관한 관심을 억제하고 국정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왕이 여자에게 정신을 쏟지 못하도록 사전방지 활동만 벌인 게 아니었다.

철저한 마크에도 사고가 발생하면 사후진압 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후진압 때문에 체면을 구긴 왕들의 사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미모의 후궁인 홍희빈을 특별히 가까이하다가 조정의 견제를 받았다.

중종 13년 어느 날 아침, 그는 경연에 나갔다가 사헌부(검찰청) 정4품 관료로부터 '여색에 빠지는 자는 용렬한 임금'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평검사한테서 '여자 조심하라.'는 막말을 들은 것이다.

제19대 숙종은 미모의 궁녀인 장옥정(훗날의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으려다가 '미인을 경계하시라.'는 상소를 받았다.

숙종 12년(1687년)의 일이다.

숙종이 끝내 자기 의지를 관철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가 비교적 강력한 군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이 경고를 무시하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가까이할 경우, 자칫 궁녀의 신변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숙종이 궁녀 시절의 최숙빈(영조의 어머니)을 가까이하자 중전인 장희빈이 최숙빈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이 이문정의 '수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으로는, 제26대 고종 임금 때는 왕의 관심을 끄는 궁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전 명성황후(민비)와 후궁 엄귀인의 첩보망이 그처럼 촘촘했던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의 보경왕후가 이훤과 연우의 관계를 견제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 상황은 살벌했던 것이다.

이 정도였기 때문에, 왕이 얼굴 반반한 궁녀를 자기 옆에 둘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왕의 곁에서 오래도록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왕이 미모의 여인을 가까이하는 것이 100% 불가능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연산군·중종·숙종처럼 주변의 견제를 뚫고 미모의 여성들을 가까이한 왕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몇몇 왕들에게 국한된 예외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비행기 사고를 염려하는 것은 비행기 사고가 자동차·선박 사고보다 더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비행기 사고의 발생빈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사고가 한번 발생하면 전 세계적으로 시끄럽게 보도되다 보니, 비행기가 실제 이상으로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왕과 예쁜 여성의 교제는 실현 가능성이 상당히 낮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기만 하면, 주변 사람들이 견제에 나서고 실록에까지 기록되고 온 나라로 소문이 확산하였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울 것 같은 느낌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 왕들처럼 불쌍한 남자들도 없었을 것이다.

구중궁궐에 갇혀 온종일 정무와 세미나에 시달려야 함은 물론이고, 이성 관계마저도 정해진 시스템대로 해야 하고,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줄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남자로서의 행복을 누리려면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최선책이리라.

 

 

 

꿈길, 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