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비운의 가수 김정미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살던 충신동에 연예인 두 명이 한 동네 같이 살았다.
대한민국 한복 미인 한혜숙 씨와 가수 김정미 씨가 살았다는데 한혜숙 씨는 한 번도 못 봤지만 김정미 씨는 자주 봤었다.
아침 일찍 학교 갈 때 집에서 일이 분 거리인 골목에서 만나길 여러 번.
여자로서 나랑 키가 비슷했고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노래는 어린 우리들에게 그때 유행하던 뽕짝과는 달리 상당히 멋있었다.
충신시장 안으로 50여 미터 가서 골목 사거리 좌측에 김정미 님 댁이 있었고 우측엔 내가 살던 집이 있었다.
캘린더 한복 미인으로 늘 등장하던 한혜숙 씨도 이 근처 어디 살았다고 말만 들었다.
정신고녀 3학년 때 신중현 사단의 멤버로 발탁되어 음악을 시작하면서 거기서도 좀 이질적이었던 것 같았다.
방송을 많이 타진 못했어도 가수 김정미 하면 당시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이면 대부분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운수업을 하던 그다지 어렵지 않은 가정 형편에, 암튼 화려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인기나 돈을 쫓지 않고 열심히 노래 부르던 그녀가 꿈을 채 펼쳐 보기도 전에 유신 헌법의 서슬 푸른 방송 금지 처분에 묻혀 이십 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가수 활동을 타의로 접고, 암자에서 우울한 마음을 삭히다가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충신 시장 안, 이 계단 올라가면 왼쪽 두 번째에 내가 고등학교 때 살던 집이 있었고,
사진 찍은 내 뒤 골목으로 두서 번째 집이 가수 김정미 님 댁이었다.
지금 어드메 살고 계실까?
53년 뱀띠신데...
그때 군대 갈 때까지 사랑했던 연상의 여인도 동갑내기셨다. ^^
이 글을 쓰는데 아까부터 왜 이리 눈물이 나냐... ㅜㅠㅜㅠ
다음은 음악 평론가들 이야기...
한국 싸이키델릭의 여제 김정미
김정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1970년대 초를 대표하는 '한국적 사이키델릭' 여성 보컬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1973년의 두 앨범 '바람'이나 NOW'는 '한국적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정수'를 보여준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작곡, 연주, 편곡 등을 포괄하는 프로듀서 역할을 담당했던 신중현 자신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극찬해 마지않던, 김정미와 싸이키델릭 음악에 대한 해설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음반은 한국의 음반 컬렉터들의 아이템으로 고가로 거래되곤 했는데, 이는 단순히 음반의 희소성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70년대 여가수 김정미의 LP(Long Play) 한 장, 촌스럽기 그지없는 앨범 재킷에 지직지직하는 LP 특유의 잡음까지 나는 음반 한장이 450만 원에 팔렸다면?
그나마 이것도 없어서 못 파는 형편이라면?
가요 LP 수집 붐이 일고 있다.
중년층이 향수를 느끼기 위해 LP 한두 장을 사는 정도가 아니다.
20, 30대 ‘반(半) 전문가’들과 일본인 마니아들이 ‘수집광’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열성을 갖고 가요 판을 사는 바람에 가격도 치솟았다.
동아일보
신중현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 가장 부합하는 보컬리스트로 첫 손을 꼽았던 김정미는 몽환적 관능으로 무장한 한국 사이키델릭 록 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열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김정미 특유의 부유하는 듯한 목소리는 신들린 신중현의 기타 연주와 더불어 초월의 합일을 단숨에 이루어낸다.
그리고 아름다운 강산, 이 고금의 걸작은 김정미의 버전에 이르러 그저 '건전가요'가 아니라 꿈꾸는 듯한 도취의 아름다운 여행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 앨범은 한국의 대중음악이 무려 삼십여 년 전에 어떤 위대함을 성취했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시금석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70년대 당시 어떻게 이런 곡이 나올 수 있었는지 들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명곡입니다.
유신선포와 함께 내린 '가요정화조치'에 가장 많은 타격을 입으며 금지곡처분을 당한 곡들에는 유난히 김정미 곡들이 많은데 거의가 퇴폐, 창법 치졸, 가사저속 등이 이유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금지 낙인이 찍힌 음반은 갖은 수난을 당하며 폐기되어 현재 김정미 음반은 엄청나게 구경하기 힘든 희귀 판이죠.
그나마도 가끔 보이는 판은 일본인 수집가들이 모두 고가에 사간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고 부끄럽고 슬픈 가요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허브뮤직 이승용
한국에 많은 음반들이 있지만 Now 음반은 단순 대중 가수의 음반을 떠나서 한때 세계를 풍미했던 히피 문화와 반전 문화에 그 뿌리를 둔 사이키델릭 음악이라는 점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한국에서 사이키델릭 음반이 나온 점, 그리고 단순히 외국의 음악을 모방한 것이 아닌 한국적인 정서로 녹여 내서 재 탄생 시킨 한국 전통 민요 정서로 비벼 만든 한국의 락 명반이라는 점에서 Now 음반은 한국 대중 음악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사이키델릭 뮤직은 그녀에 의해 국내 처음으로 제대로 소개 되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이키델릭 뮤직이란 환각음악이 아니다.
히피사상의 궁극이 평화를 지향했듯 그녀의 음악 역시 마음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키워낸 가수 중에 가장 인기가 없었다고 할수 있다.
그녀의 음악이 제대로 평가를 받기까지는 무려 30년이란 긴 세월이 걸려야 했다.
신중현 자서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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