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이키델릭의 여제 김정미 님에 대한 추억
고등학생 시절에 한 동네 살던 김정미 님에 대한 추억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팬 카페지기 님이 어찌 아시고 방문해서 초대를 했다.
어린 시절 사랑했던 가수의 팬 카페라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가입해서 인사 말을 썼더니 지기 님이 김정미 님에 대한 추억의 이야기를 올리라고 하시는데...
아마 75년경으로 생각된다.
그녀를 자주 본 것이...
학교 갈 때나 하교할 때 정미 누나 집 앞을 거의 지나다녔다.
하루는 날씬하고 멋진 아가씨가 차에서 내렸다.
얼른 봐서도 예사 아가씨 같지는 않았다.
누구지?
저렇게 멋진 아가씨가 우리 동네에... ^^
바로 말로만 듣던 김정미 누나였다.
요 어디 사신다더니 바로 여기네...
그렇게 몇 번 지나쳤다.
한 번은 정미 누나 집 앞에서 또 만나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연예인들은 직업상 인사하는 사람에게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 아닌가?
그녀도 환하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운전기사 아저씨도 무대 의상을 들고 따라가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기사 아저씨는 인사뿐만 아니라 말도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은 연예인답지 않게 참 조신한 것 같았다.
연예인다운 게 어떤 건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암튼 눈빛이 살아 있었고 말수가 적은 여인 같았다.
그리고 어린 내 눈에도 상당히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였다.
30년 전과 별로 변하지 않은 충신 시장 안.
사진 뒷쪽으로 왼 편 골목에 내가 살던 집이 있었고 오른쪽 골목에 정미 누나 집이 있었다.
뭘 사러 나온 정미 누나와 마주쳐서 미소지으며 인사 나누던 기억이 생생하다나~ ^^
동네 충신 시장에서도 평상복 차림으로 뭘 사러 나왔다가, 지나가는 나와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할 정도는 됐다.
그런데 서로 말은 거의 안 했던 것 같다.
그냥 '안녕하세요.' 정도...
사실 내가 머슴애치고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비록 연상의 누나였지만 먼저 말 건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노래가 어쩌다 TV에 나오면 나도 모르게 열광하게 됐다.
"와, 저 누나. 우리 동네 사는데..." 하며 "노래도 잘 해~~~ ."라고 말하며 입을 못 다물고 쳐다 보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옆에 있던 형이 '야, 침 닦아라.' 했던가... ^^
기사 아저씨와는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미 누나 차종은 모르겠고, 차에 있는 아저씨를 보면 인사하고, 시간이 있으면 담벼락에 같이 기대어 서서 연예계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 기억이 난다.
그때 그분이 해병대 출신인 줄 알았고, 경호도 하는 줄 알았다.
작달막한 키에 우락부락하게 생기셔서 말 안 해도 호락호락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마 먼 친척이라고 했던가?
유신 시절 방송금지를 당하고 외국으로 떠나 살며 잊혔던 비운의 가수 김정미 님의 옛 앨범이 다시 발매되고 마니아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의 일 같지 않게 기쁜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김정미를 아시나요] 문화평론가 최규성 칼럼
김 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수로 입문해 1972년 데뷔 음반 <김정미 최신가요집>을 냈다.
이 음반에서 김 씨는 자신의 최대 히트곡 <간다고 하지 마오>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77년 열세 번째 음반을 낸 뒤 가요계를 떠났다.
모두 12장의 음반이 신중현 씨의 작품이었고, 다른 작곡가의 작품으로 1장의 음반을 냈다.
김 씨는 74년까지 신중현 씨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제2의 김추자’로 불렸다.
신중현 씨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창법은 비슷하지만, 스타일은 다르다.
김추자 씨가 시원시원하게 뽑아내는 가창력을 자랑한다면 김정미 씨는 사이키델릭 음악에 적합한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창법을 고수했다.
그래서 신중현 씨는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소화해낸 가수로 펄시스터즈와 김정미 씨를 꼽았을 정도였다.
현재 김 씨는 가요계를 떠난 뒤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어 가요계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존재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30년이 지난 지금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던 이 가수의 음반이 다시 나오게 된 것일까.
대중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김정미 씨의 이름이 음악팬들 사이에서 다시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지난 9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신중현 씨의 위상이 다시 부각되면서 신중현 사단의 일원이었던 김정미 씨도 함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로선 너무나 전위적이어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음악'이란 평을 받으며 김 씨 음악은 비로소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물론 음악팬들 사이에서 '김정미 노래 들어봤냐'는 식의 파급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소문이 번지면서 중고음반가게에서 김정미 씨 음반을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었고, 여기에 한국음악을 수집하는 일본마니아들이 신중현 씨 음반과 함께 김정미 씨 음반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김씨의 음반은 한때 200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값이 오르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 맞춰 90년대부터 절판된 우리 가요의 명작들을 재발매해온 지구레코드가 지난해 연말 마침내 김정미 씨의 음반을 다시 내기로 결정했다.
창고에 묻혀 있던 김정미 씨의 마스터테이프를 다시 찾아내 리마스터링했고, 그 결과가 바로 새로 나온 음반 <김정미>다.
이 음반은 김 씨가 지구레코드에서 70년대에 냈던 음반 세 장에서 노래를 발췌해 모은 편집음반이다.
김 씨의 음반이 재발매된 과정에는 레코드회사를 자주 드나들었던 한 가요연구가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한 이 연구가는 신중현 씨를 비롯한 당시 주요 가수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오던 이로, 음반사에 누누이 김 씨의 숨은 가치를 역설했다.
마침 흘러간 가요들을 다시 발매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지구레코드 기획팀이 이 연구가의 주장에 호응했고, 창고 속에서 수십 년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김 씨의 노래들은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그래서 새로 나온 김 씨의 음반 속지에는 발매 후기를 실어 이 연구가에 대한 감사의 글이 쓰여 있다.
간다고 하지 마오,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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