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y 내 인생, 안단테 칸타빌레

부에노(조운엽) 2016. 7. 11. 16:20

 

 

 

 

내 인생, 안단테 칸타빌레

 

 

 

작업실에 들어서자 잔잔한 클래식 기타 소리가 흐른다.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이라 우아한 바이올린 곡을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바이올린 곡은 자꾸 집중해서 듣게 되니까 불편해서… 편안한 기타연주를 들어요. 주로 스페인 곡이 많죠.”

제작실 안엔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바이올린, 첼로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모두 어딘가 한 군데씩 상처 나고 깨진 듯한 모습이다.

한눈에 오랜 세월 함께했음 직한 책상과 작업대가 악기들과 썩 잘 어울린다.

마치 어느 유럽의 오래된 도시 조그마한 공방에 온 것 같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장인이 연장을 들고 뚝딱뚝딱 금세 무언가 만들어낼 것만 같다.

바닷냄새 가득한 부산 광안리에서 만난 장인은 김호기 씨다.

부산시향 바이올리니스트에서 현악기 제작자로 변신한 ‘마에스트라 김’이 바로 이곳의 주인이다. 

바이올린을 하던 큰 오빠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 바이올린에 빠져 그대로 바이올린은 김 씨의 인생이 되어 버린다.

자신의 목표인 부산 시립교향악단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까지 어려운 집안 형편과 긴 시간을 독학으로 견뎌내고 드디어 시향의 단원이 되었을 때 하늘을 다 가진 듯 기뻐했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 같았던 큰 오빠와 한 무대에 같이 선다는 느낌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전부인 바이올린으로 사람들 앞에 우뚝 선다는 느낌은...

어려웠던 환경 속에서도 부산시향에 들어간 김 씨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큰 꿈을 꾼다.

“잠깐 안주한 적도 있었지만 단원 활동을 하며 저축도 차곡차곡 모으고 유학을 가겠다는 희망도 있었죠.”

그런데 시향 8년 차, 손가락 마비증세가 왔다.

미국까지 가서 진단을 받아보았는데 결과는 절망적.

처음으로 불행을 느꼈다.
자존심이 상해 친구들에게도 악단 동료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가 아니라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언어와 나이의 장벽을 넘어 6년 만에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제작학교에서 마에스트라 자격을 획득했다.

 

 

 


“계속 바이올린을 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요. 하지만 금과 어느 것이 더 행복했을 거냐고 묻는다면 둘 다라고 할 수 있어요. 바이올리니스트는 포기했지만 지금 새로운 일을 잘하고 있고, 또 그러한 삶의 굴곡 덕에 다른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게 감사하죠. ”

바이올린이 좋아서였을 것이다.

음악을 떼어놓고는 무엇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시립교향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녀가 대패와 톱을 들고 악기 제작자가 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하지만 악기를 다루는 것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더구나 아직은 많이 생소하고 꽤 거친 일이기도 하다.

이 일을 택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바이올린은 켜진 못하더라도 평생을 함께해온 게 음악이니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어요. 또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아서 손재주가 있었거든요. 그 두 개를 합쳐보니 바이올린 제작자가 딱 떠올랐죠.”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부녀는 함께 무언가를 만들었다.

“시향을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떠나던 때가 서른두 살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용감했죠. 가장 큰 힘이 되어주셨던 아버지였어요. 그렇게 옛날이었는데 ‘시집이나 가지.’ 하지 않으시고 선뜻 ‘널 믿는다.’고 해주셨거든요.”

권위 있는 이탈리아의 현악기 제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어도 고국의 제작 시장을 파고들기는 쉽지 않았다.
“똑같은 학교를 졸업했어도 외국에서 만들면 명품이 되고 한국인이 만들면 국산이 되는 거에요. 악기는 외제가 좋다는 편견 탓에 제작판매는 사실 쉽지 않죠. 보수, 수리하는 일이 대부분이에요.”

그래도 망가진 악기를 보면 자식이 다친 것 같은 심정이라 온 정성을 쏟아 고쳐주고 싶다.
“엉망이 돼 오는 악기들을 보면 마음 아프죠. 특히 돈 없어서 국산악기를 쓰는 학생들도 많은데 고치는 값이 새로 사는 것보다 돈이 더 들 때도 있어요. 그때마다 ‘이 악기 소리를 다시 잘 살려내면 그 아이들도 희망을 품고 일어설 거야.’ 하고 생각하며 열심히 수리하죠.”

 

 

 


서른이 넘어 다시 배운 일.

국산악기에 대한 경시 풍조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던 제작자로서의 길이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행복해서 한다.’고 말한다.

“일하다 보면 어느샌가 해가 져 있죠. 음악 소리와 작업대 불빛만 존재하죠. 세상 모든 것을 떠나 내 일에만 집중하는 순간 가장 행복해요. 보통 사람들은 생각이 많으면 온전히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는데… 걱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반대로 자신의 일에 전념할 때 고민이 사라지는 거에요. 카메라의 초점이 피사체에 정확히 맞춰지면 다른 배경들은 모두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녀의 스튜디오 한쪽 벽면엔 치료를 기다리는 현악기들과 함께 수천 장의 음반이 꽂혀 있다.

그녀는 2년 전부터 음악감상실은 운영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감성도 녹이 슬어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감성을 운동시키는 일이에요. 아직도 우리 사회는 ‘먹고 살기 어려운데 무슨 음악이냐?’라는 생각들이 있죠. 하지만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의 사례만 보아도 음악으로 사회를 바꾸는 게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감상실 회원은 다양하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에서 중년의 부부가 함께 오기도 하고, 고등학생 아들과 함께 오는 주부도 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참여하던 사람들이 점점 음악을 느낀다.

삶을 풍요롭게 가꿔나간다.

이제 그녀의 작업실은 망가진 악기들뿐만 아니라 갈길 잃은 영혼들에도 치유의 공간이 된 셈이다.

이젠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나이에 또 다른 도전을 하는 그녀.

20여 년 전 절망을 훌훌 털고 이탈리아로 떠나던 젊고 당찬 모습이 겹쳐진다.

“하나의 문이 닫혔다고 해서 자포자기하는 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에요. 사람의 능력은 한 가지만이 아니에요. A를 잘했던 사람이라면 B도 분명 잘하죠. 혹은 B를 못하게 되면 C를 하면 돼요. 바이올리니스트였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 그 어떤 일을 했더라도 재밌게 했을 거고, 잘해냈을 거에요. 음악도, 삶도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느리지만 노래하듯 흐르는 그녀의 인생은 ‘내 인생, 안단테 칸타빌레’라는 그녀의 에세이집 제목과 많이 닮았다.

 

 

 

 

살아가는 동안에 매 순간 무언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책임과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다.

자신이 평생 해오던 일을 더 할 수 없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처음부터 다시 살아가야 할 때 어떤 마음이 들지 먹먹하기만 하다.

 

지금 이 순간이 버겁고, 두렵고, 힘겹다면 이 일로 인해 만들어질 긍정적 미래를 꿈꾸어 보라. 이 순간의 고됨이 내일의 맑은소리로 돌아온다는 상상만으로도 세상살이가 배는 더 가벼워진다.”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minor, Johann Sebastian B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