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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야, 이승철 y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 짓고 있는 사회사업가

부에노(조운엽) 2016. 5. 11. 06:25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 짓고 있는 가수 이승철


 

그가 마이크를 잡고 ‘희야~ 날 좀 바라봐.’라고 노래하면, 저 자신 ‘희야’인양 전국의 소녀들이 엉덩이를 들썩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승철은 거침없이 소리를 뽑아냈고, 한동안 선글라스를 낀 밤의 황제로, 부티나는 로커로 전성기를 보냈다.
170cm 작은 키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퍼포먼스가 웅장했고, 고음으로 압도하는 가창력은 어둠에 수만 볼트 전구를 밝히는 듯했다.
그런데 그 날라리같은 가수가 조용필이 현역에서 물러난 지금까지 31년째 사랑받는다는 게 신기했다.
추억이나 신화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매년 신곡을 발표하는 동시대의 가수로 말이다.

‘대박 나는 노래는 단순해요. 내 얘기 같은 거예요. 나는 흔한 얘기 같은 그런 가사가 좋아요.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거, 흔한 거, 그 흔한 가사가 잘 붙으면 좋은 노래가 되는 거예요. 비틀스의 렛잇비처럼요.’ 그가 말했다.

5월 21일부터는 이승철 데뷔 31주년을 맞는 대규모 전국 순회 콘서트가 이어진다.

그와 시간을 같이 했다.

 

 


-왜 가수가 됐나요?

“17살 때 그룹사운드에 놀러 갔는데 가수가 없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불렀어요. 그렇게 시작이 됐죠.”

-타고난 가수였나요?

“가수는 타고나는 거에요. 연기자와는 달라요. 노력만으론 안 되죠. 나도 태어날 때부터 잘했어요(웃음). ‘학교 종이 땡땡땡’도 바이브레이션을 넣어서 부른 걸요. 나중에 가수가 될지는 몰랐지만, 결국 부활의 리더로 열아홉 살에 ‘희야’를 불렀죠.”

-젊은 날에 이미 가수로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요?

“그랬죠. 25살에 제작자로 독립했어요. 3집 때부터 매니저 없이 25년간 혼자 제작을 했어요. 그때 안 좋은 사건으로 매니저가 이별을 통보하더군요. 감방에서 나와 6개월을 쉬었는데, 그때 어머니 말씀이 ‘너도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해라.’하셨어요. 바로 트럭 한 대에 LP판을 만 장씩 싣고 다니면서 방송국, 신문사를 돌았어요. 힘들어도 일찍부터 독립하면서 자유를 누렸죠(웃음). 지금도 저는 1년에 6개월 콘서트하고 6개월은 쉬어요. 1, 2, 3월엔 스키 타고, 7, 8, 9월엔 하와이에서 휴양하고, 나머지 기간에 봉사도 하고 공연도 해요. 자유인이니까요(웃음).”

-즐거운 인생이네요.

“40살이 되기 전에 노래로 돈을 벌고, 40살 이후에는 노래로 먹고사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그게 가능했던 게 한참 활동을 했던 시기에는 음반 전성기라 밤무대도 많았고, 앨범 한 장 내면 70~80만 장은 나갔으니까요. 40이 되면서 결혼을 했고, 결혼하면서 돈 관리는 아내가 하면서 새는 돈이 많이 줄었어요(웃음).”

-열아홉에 데뷔해서 오십이 됐는데, 그사이 노래 부르는 목표나 삶의 목표가 많이 바뀌었습니까?

“완전히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이승철 개인 콘서트였지만, 지금은 공연의 하이라이트가 아프리카 영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앵콜곡을 부르는 대신, 아프리카 아이들과 학교 짓는 모습을 보여주죠.”

그는 현재 아프리카 극빈국 차드에 6개째 학교를 짓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10년 간 100개의 학교를 지어주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가수도 관중도 아드레날린이 최고조에 오를 때, 극빈국의 어린이를 보여준단 얘긴가요?


“관객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여러분이 주신 공연수익금으로 이런 학교가 지어집니다.’ 이전 학교와 새 학교 터를 보여주고, ‘7호 학교는 여러분의 돈으로 지을 거에요.’ 그러면, 막 소리 지르고 좋아하세요.”

-‘We are the World’가 따로 없군요. 이승철의 노래가 희망의 ‘떼창'이 되는 이유를 알겠어요(웃음).

“학교를 하나 지으려면 그냥 뚝딱 건물 하나를 지어주는 게 아니에요. 진흙 벽돌 찍는 것 가르치고, 학교가 왜 필요한 지 스스로가 깨닫도록 주인의식 교육하고, 화장실 똥 치우는 것, 우물 고치는 것까지 사전에 다 가르쳐요. 그리고 부족장인 술탄의 허락을 맡아야 해요. 5~6천 명 정도의 부족민을 이끄는 술탄들은 만나보면 놀랄 만큼 기품 있고 온화해요. 그분들께 사전에 무릎 꿇고 허락을 맡아요. 존경의 마음을 보이는 거죠. 마을에 가면, 부족들이 가장 큰 느티나무 아래 의자 하나 마련해 두고 모여서 ‘미스터 리(차드에서 이승철을 부르는 말)를 기다려요. 마을 원로, 청년회장까지 다 모여서 잔뜩 긴장해서 불어로 ‘우리에게 학교가 필요한 이유’를 낭송하죠.”

-심훈의 계몽 소설 ‘상록수’가 생각나는군요.

“그러고 나서 한국 스태프들과 차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해요. 차드의 양고기는 정말 맛있어요. 숯불에 구워 고춧가루로 볶아서 내온 양고기와 밥을 커다란 쟁반에 쌓아두고 손으로 함께 먹어요. 그날은 아이들도 실컷 먹어요. 언젠가는 차드의 교육부 장관이 군인들하고 지프 타고 왔어요. 고맙다고. 대통령도 만나자고 연락 왔는데,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못 갔어요(웃음).”

-한 부족에 새 삶을 주는 행복한 느낌이겠어요.

“가보면 그 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어요. 이 일을 박용하가 시작했는데, 그 친구가 학교 완성되는 걸 못 보고 죽어서 내가 이어서 하고 있어요. 거기가 이슬람권 국가지만, 술탄들은 아이들한테 ‘학교에 다니라.’고 해요. 왜냐하면, 학교가 마을 센터가 돼서, 또 그걸 중심으로 사람들이 이사 와서 모여들고 북적이고, 빵 파는 사람도 생기고, 이른바 상권이 형성돼요. 사람들도 각양각색이라 닭똥 굴러다니는 흙 바닥 위 천막 하나 치고 사는 사람도 있고, 그 와중에도 커튼 치고 정원 꾸미며 아기자기하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또 태양열로 전기도 끌어들이고, 학교 양호실은 병원이 되고, 아이들 급식 먹이려고 빵 공장도 세워야 해요.”

-유지비가 꽤 많이 들 텐데요.

“학교 하나 짓는데 5억 원이 드는데, 저하고 굿네이버스, SBS 희망 TV에서 1/3씩 내고 있어요.”

엔터테인먼트 종사자에게, 금욕적 도덕주의자 이미지는 편치 않은 굴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승철은 그런 면에선 꽤 통달한 듯 보였다.

금기를 넘어본 사람의 자유랄까.

그는 가족들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여행을 즐기다, 자오선을 넘어 먼지 바람 부는 시에라리온으로 날아간다.

힘 있는 사회사업가와 파리에서 술 한잔 하다, 뜻이 맞아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타고 현장 답사를 간다.

그렇게 해서 끌어온 복지 예산이 엄청나다.

이승철은 얼마 전 UN의 NGO 홍보 대사로 임명됐다.

세이브더칠드런, 굿네이버스, SBS 희망 TV 등 여러 단체의 해외 사업에 관여하며, 1년에 480억 원 예산을 투명하게 관리해온 것에 대한, 값없는 훈장이다.

다가오는 5월 30일, 전 세계 NGO 단체 7,000명이 최초로 UN 본부 밖인 경주에서 총회를 여는 행사의 대사인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삶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군요.

“그렇게 됐어요. 한 달 동안 다섯 대륙을 다 다녀본 적도 있어요. 아프리카, 유럽, 북미, 남미, 호주 등등. 내년에는 남극에 갈 것 같아요.”

 

 



-남극에는 왜?

“남극의 장보고 기지에 우리나라 과학 영재 아이들 데려가서 다큐멘터리 찍으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그 전에 탈북 청년들 데리고 독일에 가서 메르켈 총리도 만나고, 베를린 장벽에서 합창도 해야 되는데…

-대중에게 호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객이 전도되는 그 지점을 잘 가늠해야 할 텐데요.

“가족이 그 중심을 잘 잡아줘요. 아내가 객관적인 컨트롤러가 돼서 일산 분란하게 움직여요. 아프리카의 차드 학교는 제 의지로 시작한 거지만, 사전에 아내한테 허락을 받았어요. 굿네이버스 지사장한테 편지 쓰고, 미팅하고, 송금하고, 외국인들 상대해서 프로젝트 끌어가는 건 또 아내 몫이니까.”

-부부가 장단이 잘 맞으십니다.

“아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해요.”

-이상형인가요?

“저는 대화 통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예쁜 여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웃음). 제 아내는 예쁘진 않지만, 대화가 통해요.”

-UN의 NGO 홍보 대사는 대단히 명예로운 일인데, 어떤 루트로 연락이 온 건가요?

“2014년에 탈북 청년들 데리고 UN에 가서 노래했던 게 인연이 됐어요. 연합 뉴스 기자 하던 분이 탈북 청소년 출신인데, 제 아내에게 와서 북한 아이들에게 합창도 가르쳐주고 독도에 가서 노래도 부르게 해주고 싶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독도는 김장훈 형 거야. 그 형 건데 건드리면 안돼(웃음).’하고 반대를 했어요. 북한 관련 일 하면 총 맞는다, 독도 가서 일 벌이면 일본 못 간다(웃음), 뭐 그러면서 발뺌을 했는데(실제 후에 그는 일본 입국을 거부당했다.), 아내가 자꾸만 와서 졸라요. ‘곡만 좀 써줘요. 애들 노래 연습만 좀 시켜줘요.’ 그래서 내가 ‘탈북자 아이들은 더 큰 세상을 먼저 봐야 한다. 당신이 빌 게이츠가 강연하고 싸이도 공연한 하버드 대학의 메모리얼 처치 같은 곳을 한번 잡아봐라. 그다음에 민주주의 꽃인 UN에서 노래하게 해주면, 나도 독도 가는 걸 생각해보겠다.’ 그랬죠.”

-그래서 부인이 하버드와 유엔을 섭외했나요?

“하버드 총장한테 편지 쓰고, 반기문 총장한테 이메일 보내고 그러더니…, 해내더군요(웃음). 결국, 독도, 하버드, UN 이렇게 세 곳에서 다 공연을 했어요. 개인 돈으로 비행기 값이며 비용 다 치러가면서요.”

-싸이가 국제무대에서 뛰는 만큼이나 이승철이 국제무대에 보인 퍼포먼스도 대단하네요.

“싸이가 대단하죠. 싸이는 나중에 떨어질까 봐 불안이 있겠지만, 저는 떨어질 게 없어서 다행이죠(웃음).”

 

 



-어쨌든 상처 있는 아이들한테 노래를 가르치는 건 그 치유의 힘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음악이 주는 터칭은 위대하다고 밖에 말 못해요. 처음에 적개심에 찼던 아이들 눈빛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서서히 변해요. 한없이 맑아져요. 김천 교도소 아이들한테 합창 가르치면서 제대로 느꼈어요. 김천 교도소 소년범들은 그때 존속살인, 강도, 강간, 방화… 최하 7년에서 최장 15년 형까지 굉장히 ‘센’ 아이들이었어요. 그 무섭던 아이들이 3개월이 지나서 교화되는데, 그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에요. 교도소 아이 중에 싸움을 제일 잘하는 ‘대빵’ 아이가 있었어요. 당시에 한 방에 소년범과 성인범이 같이 갇혀 있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 살벌했던 ‘대빵’ 친구가 밤중에 라면 박스 뒤집어쓰고, 혼자 기를 쓰고 노래 연습을 하더래요.”

-교도소 아이들이 무대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나요?

“기존 노래 중에 ‘거위의 꿈’하고, 또 한 곡은 아이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라고 해서 그 내용을 모아서 ‘그대에게만 드립니다’라는 곡을 썼어요. 원래는 공연을 교도소 강당에서 가족들 모아 놓고 하는 거였는데, 그때 제가 또 우겼어요. 아이들한테 바깥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교도소장한테 시민회관으로 애들 좀 내보내 달라고. 당연히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이승철은 또 한 번 ‘쇼생크 탈출’의 역사를 이뤄냈다.

법무부 장관을 찾아가 승인을 받아낸 것.

결국, 그날 시민회관 행사에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전국의 지검장들이 다 모였다.

안전을 위해 100여 명의 경찰이 동원됐지만, 24명의 아이는 수의도 포승줄도 벗고, 무대에서 가장 멋진 턱시도를 갈아입었다.

2곡의 노래가 끝난 후 가족도 울고 아이들도 울고 장관도 울었다.

특별 면회가 허용됐고, 어떤 아이는 7년 만에 시민 회관 매점에서 엄마 손을 처음 잡았다고 했다.

그 뒤 교도소 합창 대회는 공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탤런트 최불암과 가수 BMK가 멘토가 되어 이끌었다.

-아이들의 변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축복일 테지요?

“노래 한 곡 히트하는 것보다 뿌듯해요.”


-우리는 왜 음악을 들어야 할까요?

“음악은 혼자서도 계속 흥얼거릴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음악은 추억을, 기억을 남기니까요. 예전에는 음악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남긴다'고 생각해요.”

인터뷰가 끝나고 도심 속으로 걸으며, 대한민국의 가수 이승철과 차드 부족의 ‘미스터 리'를 생각했다.

파란만장 ‘미스터 리’!

내 생각엔 열아홉 살 가수로 돌아가더라도 그가 과거의 실수, 나쁜 기억을 지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덕에 교도소 아이가 마음을 열고 7년 만에 엄마 손을 잡아봤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