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화물선
파나마 운하와 고갱
'HAPPY LATIN' 호는 거친 대서양을 헤쳐나와 잔잔한 카리브해로 접어들었다.
반지의 제왕, 아바타 등의 영화 OST를 부른 감미로운 목소리의 아일랜드 가수 Enya의 노래 '캐리비안 블루'로 많은 사람의 가슴에 카리브 하늘과 바다에 대한 동경을 갖게 했고, 파란 천연 보석 '라리마'로도 널리 알려진 아름답고 정말 푸른 카리브 바다.
바다가 오죽 푸르면 그 속의 돌도 파랗게 변할까?
넋을 잃고 카리브 바다를 쳐다보며 항해하다 보니 파나마 운하가 가까워졌다.
운하를 통과하면 유빈 누나가 사는 뻬루의 삐우라를 향해 남미대륙을 왼쪽으로 끼고 남쪽으로 항해하게 된다.
어느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 사관 식당에서 점심 먹고 커피 한 잔씩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늘 대화를 주도하는 대빵 안 선장님.
"곧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텐데 우리는 편하게 항해하지만, 대역사를 치를 때 수많은 민초의 희생이 있는 건 잘 알지요? 운하 건설은 스페인의 무적함대 시절부터 구상은 했지만, 시작은 프랑스에서 했는데 자연과 모기와의 싸움에서 인간이 무너졌소. 내 사위도 프랑스 사람인데 자기 할아버지 대에 운하 건설에 투자했다가 다 날렸다고 합디다. 프랑스인들은 파나마에서 공사하면서도 프랑스식으로 살려고 했대요. 그들은 주거지에 정원을 만들고 나무 주위에 개미가 모여들지 말라고 도랑을 파고 물을 넣었어요. 침대에도 벌레가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고 침대 다리에 물통을 만들어 물을 집어넣었다지. 옛날 현대 정 회장이 못 살 때 빈대가 물지 말라고 판자 침대 다리에 물통을 만들어 물을 넣었더니 빈대가 피 묵고살려고 뛰어올라 무는 것을 겪고, 일하는 게 맘에 들지 않는 직원에게 '이 빈대만도 못한 놈아!'라고 했다지. 프랑스인은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오두막에 방충망을 만들어주지 않았어요. 우기가 시작되자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돌았지. 게다가 프랑스인들이 사는 방식은 모기가 배 터지게 피를 빨아 먹고 번식하기에는 최적이었던 모양이오. 그렇게 해서 기술자와 노동자 이만이천여 명이 사라졌대요."
세계 일주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단독 무착륙 무보급 세계 일주 기록으로는 67시간에 37,000km를 난 기록이 있단다.
마젤란이 빅토리아호를 타고 세계 일주할 때는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후 세계 일주 항해가들도 이 년의 시간에서 더 줄이지 못했다.
시간이 확 줄어든 때는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쓴 쥘 베른이 당시에 존재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80일이 걸릴 것이라고 계산했다.
실제로 1889년 미국인 기자 넬리 블라이가 세계 일주에 도전했는데 이때 72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녀는 아메리카와 유럽에서는 증기선과 철도를 이용하고 아시아에서는 말과 당나귀, 인력거와 돛단배를 이용했다.
삼백 년 사이에 세계 일주 시간이 3년에서 10주로 단축되었다.
그래서 누구나 레셉스가 파나마 운하를 성공적으로 개통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수에즈는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아 비가 내리는 날이 거의 없었지만, 파나마 지역은 연중 비가 많이 내리는 열대우림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공사 중에 수시로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했다.
레셉스는 여기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아 공사하던 것들이 홍수로 떠내려가는 일이 빈번했다.
미국은 철저한 계산으로 접근했다.
가장 적은 비용을 들이고 대공사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날씨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먼저 정확한 날씨 예보를 위해 기상관측 인원을 늘렸다.
또 호우가 예상되면 미리미리 대비했다.
여기에 미 육군 공병대는 대대적으로 모기 방역을 했다.
이제 홍수나 산사태, 황열병으로 인한 인부 사망이 줄었고 미국은 레셉스가 수에즈 운하를 만들 때 썼던 수평 운하 방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갑문식 운하 방식을 채택했다.
파나마운하는 물길 중간에 여러 갑문을 설치해 물을 채우고 빼면서 배를 계단식으로 통과시킨다.
운하를 통과하는 데 8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기 시간 등을 합치면 하루 이상 걸린다.
갑문을 통과할 때는 수로 양옆에서 예인 전동차가 끌고 터그보트가 밀어준다.
파나마운하가 해상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많은 배가 여기에 맞춰 만들어졌다.
길이 295m, 너비 32m 등 파나마 갑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최대 크기 배를 'Panamax'라 한다.
통행료는 선박 종류 등에 따라 다르지만, 파나맥스급은 약 20만 달러라고 한다.
타히티를 낙원으로 그린 고갱
캡틴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됐다.
"그런데 말이지 파나마 운하 공사장에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폴 고갱도 있었대요. 당시 고갱이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은 악몽처럼 묘사돼 있어요. '나는 아침 5시부터 저녁 6시까지 열대의 태양 아래 또는 빗속에서 땅을 파야 했소. 밤이면 모기들한테 뜯어 먹혔지.' 그의 나이 39살 때였어요. 다섯 명의 자녀를 뒀으나, 손에 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가난뱅이였지. 미약한 인간들의 처절한 싸움터, 바로 파나마 운하 건설 공사판에서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떠났지. 그는 먹고살기 위해 배도 탔다지. 우리 마도로스 선배라는 말이야."
잠시 쉬었다가 캡틴이 물었다.
"학생 때 '달과 6펜스'를 쓴 '서머셋 모옴' 이름은 들어봤겠지? 그는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지론으로 회화체가 주를 이루는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논리 정연하여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쉬워요. 서머셋 모옴은 무명시절 자신의 책이 팔리지 않자, 신문에 광고를 냈대요. 젊은 백만장자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주인공 닮은 여성을 찾는다고 말이지. 이 광고가 나가고 어떻게 됐겠소?"
마침 1항사가 입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얼른 대답했다.
"아~ 거, 노벨상은 안 받겠다 하고 나중에 상금만 달라고 해서 거절당한 작가 이야기 아닙니까?"
"에이,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그건 사르트르 이야기고."
"하하하~ 그럼 당근 작가가 사기 쳤다고 아가씨들한테 머리 쥐어뜯기도 했겠죠. 어디선가 늙은 작가 사진 보니 머리가 반쯤 없던데요."
"푸하하~ 애고, 잘 나왔소. 늙어서 머리 빠진 거와 뭔 상관인데, 암튼 둘러 붙이긴... 책이 품귀되고 난리 났지. 그런데 소설이 재미있거든. 그래서 서머셋 모옴은 유명 작가가 되었대요."
1917년, 한 영국인 작가가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 발을 디뎠다.
14년 전 이 섬에서 죽은 한 화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작가는 13년 전 파리에 들렀을 때 우연히 그 화가의 비극적 생애와 놀라운 작품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낀 터였다.
화가의 특이한 삶과 예술정신을 소설로 쓰고 싶은 촉이 발동했다.
마침내 섬을 찾아오게 된 작가는 깜짝 놀랐다.
타히티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곳 사람들의 원시적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명 세계를 혐오해 고국을 떠나온 화가는 말년에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자신의 그림을 먹을 것과 맞바꾸기도 했다.
마을의 구멍가게 주인은 그렇게 바꾼 화가의 데생을 포장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 화가가 그려준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락방에 처박아놓고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화가의 그림 선물을 코웃음을 치며 거절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취재 여행을 마친 작가는 화가가 머물렀던 오두막 문짝에 그린 그림을 헐값에 사 영국으로 가져갔다.
그 그림은 1962년 경매에서 만칠천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 뒤 작가는 '달과 6펜스'라는 작품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작가의 이름은 바로 서머셋 모옴.
그가 타히티섬에서 흔적을 찾아 헤맸던 화가는 다름 아닌 자기 귀를 자른 화가 고흐의 친구 폴 고갱이었다.
1파운드도 아닌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떠난 고갱의 삶은 물질과 탐욕에 찌든 문명사회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인간성의 발견과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한 인간의 뜨거운 열망으로 봐야 한다.
독특하고 과감한 색채가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평론가와 세인의 관심을 끌고 피카소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과감하긴 하지만 새롭지는 않다."
전시회에 대한 평론가의 말에 고갱은 단호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미술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다."
가난과 고독, 질병에 시달리던 고갱이 죽고 얼마 후 프랑스 미술계는 그의 작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의 열정과 인생 그리고 독특한 예술 세계를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갱은 생전에 그런 영광을 한 번도 만끽하지 못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은 이러한 인생사를 볼 때 살아서 술 한 잔이 나은지 죽어 석 잔이 나을지 아이러니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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