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잉카제국 멸망과 정복자 피사로

부에노(조운엽) 2019. 9. 9. 07:05




Inti Raymi, 태양제는 잉카인의 태양숭배 사상을 담고 있다.

잉카인은 태양이 사라지면 인간 세상도 사라진다고 믿었다고 한다.



잉카제국 멸망과 삐사로 



"오늘 출항한다며 뭐 그리 빨리 간대?"

"아녜요, 일요일 끼고 오래 있는 거예요. 굴러다니는 차 하역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요. 곡물이나 잡화 싣고 오면 좀 오래 있긴 해도요."

유빈 누나가 못내 아쉬운 듯 눈가가 젖으며 잠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럼 이 근처에 잉카제국의 마지막 역사인 까하마르까라는 곳이 있는데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누나 말에 반색하고 대답했다.

"구경한 지 하도 오래돼서 이름도 잊었네. 거 까만 종이 같은 거에 단무지 넣고 밥 말아 싼 게 먹고 싶은데..."

"뭐 말하는 거야... 김밥?"

"아, 그래요. 눈 감으면 떠오르고 눈 뜨면 사라지는 김밥, 소풍 가서 먹던 김밥과 삶은 닭알이 먹고 싶어요. 여긴 뻬루니까 꼬까콜라 대신 노란 잉까꼴라하고요."

내 능청에 환한 웃음을 터트리며 유빈 누나가 종알거린다. 

'김이 남은 게 있으려나. 눅눅해진 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단무지 대신 뭘 넣으면 좋을까...'


삐우라에는 한국 부식 파는 데가 없어 마이애미에서 일 년에 몇 번 컨테이너로 중고 부속이나 더블 픽업 사고 차를 잘라서 보낼 때 고추장, 된장, 라면 같은 한국 부식을 사서 보낸단다.

그러니 뭐든지 없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누나, 마이애미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어원에 대해 알아요?"

내가 묻자, 잠시 생각하다가 누나가 대답했다.

"이름이 예쁘긴 한데 내가 어떻게 아니?"

"그게 아메리칸 인디언 마이애미족이 거기 살았는데 인디언 말로 마이애미아가 '하류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래요. 16세기에 스페인 애들이 점령했다가 19세기 들어 미국 애들이 빼앗았대요. 우리 조상들은 그때 뭐 했나 모르겠어, 애먼 사람들 삼수갑산으로 유배 보낼 게 아니라 사람 거의 안 살던 보르네오섬 같은 데라도 보냈으면 '이 땅은 나의 땅!' 하고 깃발 꽂고 만세 불렀을 건데." 


잉카제국의 고도였던 카하마르카, 잉카 몰락의 전주곡을 울렸던 도시다.

해발 2,750m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 도시이다.

잉카제국의  황제가 스페인 사람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붙잡힌 곳이기도 하다.

바뇨스 델 잉까는 황제가 이복동생과의 왕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온천수에서 쉬다가 에스빠냐의 피사로 군대에게 잡혀 결국 잉카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서글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80도의 유황 온천수는 솟고 있고 그 옆에는 예쁜 꽃이 피어 있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뻬루의 수도가 된 리마를 건설하러 갔다.

그런데 그는 까막눈이었기에 직접 남긴 잉카원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피사로의 고향은 스페인에서 가장 못 사는 지역이라 땅이나 파서 먹고살기 싫었던 그는 스무 살이 되자 군인이 되려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던 중 한몫 잡을 생각으로 신대륙 개척에 합류하였다.   

그 후 발보아의 원정대에 끼어 처음으로 태평양을 본 유럽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파나마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총독의 지시로 직접 발보아를 체포하였고 그 공으로 파나마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파나마는 당시엔 아직 개발 중이라 밀림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투만 그럴듯했지 실속은 없었다.

장관자리가 괜찮았으면 피사로가 굳이 머나먼 잉카까지 목숨 걸고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1521년에 먼 친척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겨우 천여 명의 군사로 아즈텍제국을 정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여기에 더하여 남쪽 어딘가에 황금의 제국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남아메리카 원정을 결심한다.

당시 남미는 그야말로 미지의 땅으로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멕시코 일부와 파나마 정도였다.

처음 남미 원정은 정보 부족, 식량 부족으로 거지꼴로 돌아왔다.
그래서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의 남미 원정을 반대하게 된다.

사실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때는 파나마 건설을 시작하던 때라 일손이 턱없이 모자라는 판에 허황한 보물 얘기로 젊은이들을 꼬여 데려가는 것이 좋았을 리가 없다.
총독은 연락병을 보내 피사로에게 귀환하라고 했다. 

그러나 피사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땅에 선을 긋고 '나와 함께 할 사람은 이 선 안에 남아라!'고 선언, 13명이 남는다.

후에 이들은 '명예로운 13인'이라고 역사에 남는다.

이 13인은 귀환을 거부하고 상거지로 몇 달을 더 버틴다.

결국 피사로는 파나마 총독보다 끗발 좋은 사람을 찾아 고국으로 돌아간다.


피사로는 카를로스 국왕에게 남쪽에 아즈텍만큼이나 잘 사는 나라가 있다고 보고하고, 그 증거로 각종 금은보화와 원주민 통역사까지 보여주니 국왕은 입이 절로 찢어졌다.

카를로스 1세는 바로 피사로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 하고, 정복군의 총사령관, 미래의 총독 지위를 약속한다.

실제 피사로의 남미 원정은 제대로 지원받지도 못했을뿐더러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이는 멕시코와 파나마 건설이 막 시작해서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허가'라는 것도 실질적인 지원은 전무했으며 국왕이 서명한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국왕의 허가를 받은 피사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차피 땅이나 파먹고 술에 절어 살 신세인 동생들을 꼬드겨 함께 신대륙으로 떠난다.

그렇게 피사로의 선발대가 안데스산맥을 넘어 카하마르카부근에 다다른 피사로는, 바로 근처에 왕권 다툼에서 승리한 잉카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게 된다.


피사로의 원래 계획은 잉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뒤 충돌 없이 순조롭게 제국을 접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정복한 방법에서 교훈을 얻어, 황제 신병 인수 후 이용만 하고 버릴 심산이었는데 뜬금없이 황제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접근 중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잉카 군사는 잘 정비된 고산 도로망과 봉화로 낯선 자들이 카하마르카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담으로 잉카인들은 고산 도로에서 이동할 때 발자국이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부족에게 노출되지 않게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걷기 때문이란다.

험준한 안데스 고산을 오르느라 기진맥진한 스페인 군사들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부처님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는 고산지대의 잉카 용사들.

셀 수도 없이 많은 군막과 잘 정돈된 주둔지는 스페인 군사들이 상상하던 미개한 원주민 군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쪽수로도 도저히 상대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사신 소토가 처음으로 잉카 황제를 접견한다.  


이때 황제는 난생처음 말을 보았는데 특히 사신이 황제 바로 앞에서 말을 급정지하는 기마술을 보이자, 경호 대원들이 순간적으로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심각한 판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스페인 군인이 몇백 명밖에 안 된다고 깔보고 호위 병력도 없이 직접 찾아간 것이다.
한편, 예상치도 못하게 황제의 대군과 마주친 데다가 그가 직접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피사로 원정대는 바짝 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잉카 군대는 수만 명인데 자기들은 겨우 보병 106명, 기병 62명 모두 168명에 대포가 10문뿐이었기 때문이다.

 

잉카 황제가 가마를 타고 나타나자 제일 먼저 나선 이는 수사였다.



그는 스페인 국왕의 조서를 읽어주었다.

그러나 통역을 해줘도 잘 알아듣지 못한 황제는 책이나 문자를 태어나서 처음 보았기에 얇고 하얀 종이를 넘긴다는 행위 자체도 신기할 뿐만 아니라, 그 걸 보고 소리 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고종황제에게 스마트폰을 준 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까.

그러자 수사가 도와주기 위해서 책을 펼쳐 넘겨주려는데...
문제는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황제가 낯선 이방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열 받았다.

신경질이 난 황제는 수사의 팔을 때리고, 혼자서 책장을 넘겼지만 역시 잘 안 되니 책을 자기 발 앞에 던졌다.

 

이에 극도의 공포감에 겁이 난 수사가 스페인 측 진영으로 도망치며 '저놈들을 공격해라. 하느님을 거부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에 어쩔 줄 모르던 피사로가 반대편에 숨어있던 포병에게 공격신호를 보냈고 곧바로 몰려나와 몸싸움을 벌이며 황제를 생포하고, 잉카인들을 향해 냅다 대포를 쏘고, 기병이 돌진하여 잉카병사들을 도륙하였다고 한다.

이때 수많은 잉카 귀족들이 한순간에 죽었다고 한다.

황제의 가마를 메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 고귀한 일이기에, 고위 귀족인 가마꾼들은 팔이 잘려 나가더라도 가마를 붙잡고 있었고, 가마꾼이 죽어 쓰러지면 다른 귀족이 달려와 가마를 멨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도 국왕이 용변 보면 뒤처리는 시종이 하는 게 아니라 귀족들이 했다고 한다.

이때 고위 귀족들이 많이 죽고 또 사망자 중 많은 수는 도망치다가 넘어져 깔려 죽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당시로써는 거의 최신식 병기라고 할 수 있는 철제 무기와 투구 및 갑옷으로 무장했고 말과 총, 대포까지 갖춘 군사였고, 잉카 용사는 수만 많았지 갑옷이라 하기에는 웃기는 전통적인 직물 소재에 청동과 나무곤봉으로 무장한 방범대 수준이었다.

잉카 병사의 주력 무기인 나무 곤봉으로는 스페인 군사의 튼튼한 철제 갑옷과 투구에 대항할 수 없었다.

결국 황제는 어처구니없이 피사로 원정대에게 생포되었으며 수만 명에 달하는 잉카 대군이 완전 초토화되었다.

이로서 피사로는 한숨 돌리게 되었다.

그의 목적은 식민지 건설과 자기가 총독이 되는 것이기에 잉카의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를 최대한 옆에 끼고 있어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식민지 건설이 가능하고 황제를 죽인다거나 잉카와 전쟁을 벌일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다.

 

곧바로 황제는 이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이방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바로 금과 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었다.

그래서 이 탐욕스러운 침략자들에게 그 유명한 제안을 한다.

바로 자기가 잡혀있던 방에 금과 은을 채워줄 테니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보존된 꽈르또 델 에스까떼, 즉 '몸값의 방'이 여기서 나왔다.

어쨌든 이러는 사이 잉카의 금과 은이 차곡차곡 모였다.

그리고 피사로의 원정대가 이것들을 전부 녹여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휘하의 장병들에게 재물을 정확하게 분배하기 위해서였다.

기록에 따르면 기병 1인당 은 82kg과 금 41kg, 보병들에겐 그 절반이 분배되었다고 한다.

요즘 시세로 계산하면 기병 1인당 20억, 보병 1인당 10억 원 정도 받은 셈이다.

피사로의 경우 기병의 일곱 배를 받았으며, 황제에게서 보너스로 80kg짜리 황금 가마까지 선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스페인 국왕은 도장 한번 잘 찍어준 덕분에 금 1,000kg과 은 2,000kg을 받았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승리자 전원이 이처럼 많은 재물을 포상받은 경우는 세계 역사에 없었다.  

그런데 피사로의 동업자인 알마그로와 배분에 불화가 생겨 결국 애먼 잉카 황제를 처형하게 된다.

그 후 알마그로는 원정대를 이끌고 미지의 남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소또는 잉카에서 얻은 재물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하여 북아메리카로 올라갔다.


원정 초기에 피사로가 용감한 13인과 원정을 계속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이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단 몇 달이라도 원정이 늦게 이루어졌다면, 잉카 황제는 이미 수도인 쿠스코에 입성해 정부를 수립했을 것이고, 따라서 날로 먹는 잉카 황제 체포 사건같은 게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스페인은 황제를 무력화시키지 못한 채 아즈텍을 능가하는 잉카제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야 했을 것이다.

다만 스페인과 잉카의 역량 차이를 볼 때 잉카 쪽이 상당히 불리하고 결국 중남미는 어떻게든 스페인 혹은 다른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잉카제국은 차근차근 정복자들에게 넘어갔으며, 더욱더 깊고 으슥한 곳으로 향한 잉카는 빌까밤바에 마지막 잉카 망명 정부를 세워 저항했으나 1572년 마지막 황제가 체포, 처형될 때까지 겨우 30년 명맥을 유지했다. 
이로써 잉카제국은 한 세기만에 사실상 해산 혹은 멸망하였다.

어쨌거나 피사로의 원정은 역사를 바꿨다.


잉카 제국의 멸망 뒤안길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퍼트린 우두가 창궐하여 인디오가 반 가까이 죽어 이미 잉카 제국이 쇠약해졌고, 수만 명의 다른 인디오 부족이 잉카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스페인 편에 섰다고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적은 인원으로 너무나 쉽게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이를 계기로 브라질을 제외한 전 중남미를 식민 통치하게 되었다.

물론 역사를 바꾸게 되는 과정이 잘못되었기에 식민지 역사를 겪은 원주민은 피사로를 역사상 최악의 제국주의 악마, 흡혈귀 같은 식민주의자로 평가한다.

심지어 조국인 스페인에서도 일단 본국에 이득이 가게 한 위인이지만, 남미에서 그가 한 짓은 피의 악마라고 말한다.  

일국의 황제가 천주교 좀 안 믿는다고 체포해 죽이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삥뜯기가 자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거대 문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한마디로 피사로 때문에 훗날 세계사에서 근대와 현대로 나뉠 정도로 유럽의 급성장 원동력이 되는 산업혁명의 발단을 마련했다.
참고로 피사로 원정 이전까지는 금과 은이 부족해서 시뇨리지를 통한 화폐 제조가 잦았다.

그러나 신대륙의 은광 발견과 더불어 명나라의 은화가 유럽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화폐 부족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서유럽의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산업혁명이 다른 문명보다 빨리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