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항해일지 중 선박 화재와 적도제

부에노(조운엽) 2019. 10. 23. 06:38




기관실 화재로 불이 난 현대 포춘호, 나중에 예인해 독에서 수리하여 몇 년을 더 운항했다. 



항해일지 중 선박 화재와 적도제



“올 스탠바이, 올 스테이션!”

숯을 가득 실은 거대한 ‘HAPPY LATIN’ 호는 기관실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고 숯 검댕만 빼고 아름다운 브라질 포인트 우부 항을 뒤로하고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포르투갈을 향해 북으로 선수를 돌린다.  

선미에 있는 연돌에서는 벙커 에이가 덜 연소한 검은 연기와 함께 쌓여있던 숯가루가 하늘을 뒤덮는다.

도대체 배 안팍에 숯검정이 없는 곳이 없다.  

도선사가 내리자마자 갑판부 선원들이 달려들어 120mm 소방호스로 선내 물청소를 시작했다.

스크루 뒤로 까맣게 따라오는 본선에서 흘러내린 숯가루 물거품.  

바다가 파래야 제 색인데 우리 배로 인해 까맣게 변하니 죄짓는 기분이다.

배 밑바닥 밸러스트 탱크에 해수를 가득 채웠는데도 숯이 무게가 가벼워 만선이지만 배는 수면 위로 붕 떠 있다.


이 밸러스트 워터가 생태계 변화와 오염에 적신호이다.

전 세계 물동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화물선은 선적화물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선박의 안정성을 위해 밸러스트 탱크에 해수를 넣어 운항한다.  

이 밸러스트 물은 선박이 철재로 건조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 사용되었다.
그런데 밸러스트 워터는 토착 생태계를 파괴하고 교란하기에 문제가 큰데 연간 수백억 톤이 이동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호주 바다는 청정지역이라 고유의 전복, 조개 등 어패류가 널려 있는데 북태평양 산 아무르 불가사리가 출현하여 초토화되었고, 우리나라 연안에는 지중해산 담치가 유입되어 홍합과 미역, 멍게가 현저히 줄어들고 발전소의 취수구를 막는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밸러스트 탱크 내의 해양생물은 약품이나 기계로 걸러 일부 제거할 수 있으나 아직 효과적인 제거법으로 국제해사기구(IMO)의 인증을 받은 사례는 없다.


좌현에 아스라이 브라질을 스치며 포르투갈의 오 뽀르또 항을 향해 부지런히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적도가 가까워진다.

적도의 열기에 낮에는 배 갑판도 녹일 듯 철판이 쩔쩔 끓는다.  

점심때 먹은 시원한 냉면도 어느덧 소화가 다 된 것 같아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어제도 달렸듯이 오늘도 갑판 위를 달린다.  

자동차와 중장비를 싣고 남미로 내려올 때는 갑판 위가 복잡해 다칠까 봐 제대로 뛰지를 못했다.

순풍에 돛 단 듯 남대서양 끝자락의 거울같이 잔잔한 바다를 물 찬 돼지같이 항해하는 ‘HAPPY LATIN’ 호.   

더운 열기를 온몸에 받으며 숨을 헐떡이고 로키처럼 갑판 위를 뛰었다.

하우스마린을 향해 뛸 때는 당직 중인 1항사가 엄지손가락을 한 번씩 치켜 올려준다.


그런데 한창 뛸 때 배 중간의 3번 홀드를 지나면서 느낌이 이상하다.

적도의 뜨거운 열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다시 선수를 돌아 뛰며 3번 홀드 쪽으로 가까이 가니 너무 뜨겁고 숯 타는 냄새와 연기가 새어 나오는 게 보인다.

불난 거 아니야?  

선교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1항사에게 연기 난다고 고함을 쳤다.

급히 화재 경보가 울리고 최소 당직자를 제외한 전 선원들이 갑판으로 뛰어나온다.  

해치 커버는 이미 손댈 수없이 뜨거워져 있다.

일단 소방호스로 해수를 쏘아댄다.  

크레인으로 해치 커버를 열자 개스 프리해주는 작은 파이프 말고는 밀폐되어 있던 홀드 안에 공기가 들어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브리지에서 캡틴의 고함이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린다.

“어이~ 당황하지 말고 불 한두 번 보냐? 좀 떨어져서 소방호스로 계속 쏴! 2항사는 선원 두어 명 데리고 선내에 있는 소방호스 있는 대로 다 가지고 와! 초사는 인명 피해가 없도록 캐라!”  

일단 불길을 잡자 캡틴이 다시 명령한다.

“초사! 다른 홀드도 다 열어서 이상 없나 확인하소.”  

홀드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차 있던 연기가 나온다.

전에 잔가지와 낙엽 쓰레기를 태운 적이 있는데 다 탔다고 생각하고 물을 뿌리다가 비가 와 안심하고 잊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에 그 자리에서 연기가 나고 빨간 불씨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잘 마른 줄 알았던 숯덩이에 작은 불씨 하나가 몇 날 며칠을 숨죽이고 있다가 서서히 발화하여 거대한 ‘HAPPY LATIN’ 호를 삼켜버릴 뻔했다.

본사와 대리점에 본선에 덜 건조된 숯이 실려 불날 뻔했다고 강력한 어조로 전보를 때렸다.






한국 해양대 학생들의 적도제 뒤풀이 

 


선교 한가운데에는 돼지머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욕재계와 면도를 깨끗이 하고  다른 제삿밥들 가운데 눈을 감고 앉아 선원들을 보고 방긋 웃고 있다.

안 선장님이 2항사에 웃으며 말한다.  

“어이, 세컨사! 적도제 해 봤지?”

“아뇨. 말만 들었습니다.”  

인상 좋은 해군 중위 출신 2항사가 아직 군기가 빠지지 않은 듯 씩씩한 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써드사는?”  

“네, 저도 실습선 탈 때 적도는 통과 못 해봤습니다.”

두 젊은 사관이 서로 쳐다보며 멋쩍게 웃는다.  

캡틴도 두 항해사를 보며 미소 짓고 1항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천상 1항사가 적도제를 지내야겠구먼.”  

기관장이 지켜보다가 한마디 거든다.

“예, 캡틴!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런 제를 알겠어요? 그냥 먹고 노는 거지. 안 그렇소, 국장?”  

모두 웃으며 캡틴을 쳐다본다.

“그려, 그렇게 합시다. 어이, 실항사! 자네 노래 잘한다며?”  

실항사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2항사가 얼른 나선다.

“아, 얼른 기타하고 하모니카 가져와! 돼지한테 절하기 싫으면.”  

해도 상 적도에 가까워지자 여기저기에서 긴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우리 마도로스들만의 낭만인가?


배가 적도를 통과할 때 안전한 항해나 만선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적도제는 범선시대에 배가 바람이 불지 않는 적도 부근을 항해할 때 바람이 불기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지냈던 의식에서 시작했다.

적도 부근은 온도가 높아 기류가 상승해 스콜이 매일 내리는데 바람은 약하다.

그래서 범선이 통과하기가 어려웠다.

적도제는 이렇게 생겨난 배에서 중요한 의식이다.

이 풍습은 지금도 남아있어 적도를 통과할 때 적도 통과 경험이 제일 많은 사람이 해신으로 분장하여 경험이 없는 선원들을 골려주기도 한다.

돼지머리와 과일, 떡, 북어 등으로 상을 차리고 큰절을 한다.

제가 끝나면 정종이나 다른 술을 마시며 전 선원과 승객들이 즐거운 파티를 한다.


아이가 부모를, 또는 친한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는 현상을 싱크로니 경향이라고 한다.

부부가 닮아가고 아이가 부모를 또는 친구끼리 어투와 생각이 비슷해지듯이.  

우리 ‘HAPPY LATIN’ 호 승조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중독되어 공유하는 말과 동료애가 만만치 않다.

천천히 지는 적도의 석양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 동료 선원들에게 적지 않은 마음의 선물을 받아왔다는 것을 느낀다.

나 혼자 잘난 척 생각하지만, 나보다 잘난 사람은 천지에 있고 나 없어도 세상은 안 무너지고 잘만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