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항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마도로스 단상
대서양을 건넌 항해는 11세기 바이킹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1492년에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항해가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고 종교재판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런던에서 대서양 연안의 항구 브리스톨까지 철도가 놓였다.
그 노선을 서쪽으로 연장해 대서양을 건너 뉴욕까지 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까지는 범선이 주를 이루었는데 기선으로 운항하려면 석탄이 많이 필요해서 화물이나 승객을 실을 공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배를 크게 만들었다.
길이 64m에 1,320t인 그레이트 웨스턴호는 당시 가장 큰 기선이었다.
그레이트 웨스턴호는 1838년 브리스톨항을 떠나 15일만에 뉴욕항에 들어갔다.
이 기록은 범선보다 두 배나 빠른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기선이 정기적으로 대서양 횡단 항해를 하게 되었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었고, 비행기로 북대서양 횡단은 1919년 영국 조종사 앨콕과 브라운이 처음으로 해냈다.
그들은 샌드위치와 위스키를 싣고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에서 이륙했다.
평균 시속 190㎞로 16시간에 걸친 힘겨운 비행 끝에 3,040㎞를 날아 아일랜드의 한 습지에 불시착했다.
비행 중 그들은 엔진 고장과 안개, 눈으로 고생했고 엔진의 공기 흡입구에 달라붙은 얼음을 긁어내기 위해 공중에서 날개 위로 내려가기도 했다.
어쨌든 두 사람 다 무사했고 달려온 지역 주민들이 어디에서 왔냐고 묻자 그들은 '아메리카'라고 대답했다.
앨콕과 브라운은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영국 왕실에서는 그들에게 돈 안 드는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런데 뉴욕에서 호텔을 경영하던 레이먼드 오티그는 그저 대서양 한쪽 끝에서 반대 쪽으로 건너는 것보다 미국 뉴욕에서 프랑스 파리 공항까지 쉬지 않고 비행하는 사람에게 2만5천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많은 젊은이가 이 비행에 도전했지만, 8년 동안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앨콕과 브라운은 3,000㎞가 조금 넘는 거리를 비행했지만, 뉴욕에서 파리까지 가려면 5,800여㎞를 날아야 했다.
린드버그는 비행을 좋아해서 직업까지 비행기로 우편을 배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이 도전에 관심을 두고 사람들이 왜 자꾸 무착륙 비행에 실패하는지 생각했다.
답은 하나였다.
그 당시 비행기에는 6,000여㎞를 비행할 충분한 연료를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새로운 비행기를 만들어서 도전한다.
린드버그는 5인용 비행기를 개조해, 조종석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 모두 연료를 실었다.
꼭 있어야 할 낙하산, 구조 신호용 조명탄은 물론이고 라디오조차 달지 않았다고 한다.
무게를 줄여서 연료를 아끼기 위한 진짜 목숨 내놓고 하는 비행이었다.
1927년 린드버그는 뉴욕에서 출발해 33시간 반을 날아 파리에 도착했다.
엄청난 열정으로 하늘의 역사를 새로 쓴 젊은이에게 대공황시대였던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열광하였고 그는 죽을 때까지 스타로 대접 받았다.
린드버그가 이 비행에 성공한 이후에 항공기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었다.
참고로 현대 비행기는 대부분 날개에 연료를 싣고 다닌다.
우리의 'HAPPY LATIN' 호는 파도가 적당히 치는 북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렇게 긴 항해를 하면 어제가 오늘 같고 생각이 두서가 없어진다.
동기 남희가 생각났다가 군대 시절 추억이 떠오르고 부모님과 가족들 생각도 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우리 배가 남미를 떠나 또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전에 다른 배 타고 은의 나라 아르헨티나에 입항했던 추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선교에서 항해사들의 교신 소리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앞바다를 뒤흔든다.
“폭슬(선수), 여기 브리지! 감도 좋습니까?”
“여기 폭슬! 감도 좋아요. 감도 좋습니까?”
“예, 감도 좋습니다. 풉(선미), 여기 브리지! 감도 좋습니까?”
“여기 풉! 감도 좋습니다. 감도 좋습니까?”
“예, 감도 좋습니다.”
이어 울리는 캡틴의 우렁찬 마이크 목소리.
“폭슬, 렛 고 앵커!”
“로져, 렛 고 앵커!”
이어 마이크에서 닻과 함께 앵커 체인이 물속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1항사의 큰소리가 들린다.
“쓰리 샤클 인 워터! 조수 방향 100도 오버!”
“폭슬, 라져! 여기 강이라도 수심이 깊으니 앵커 체인 충분히 내줘요. 풉은 해산해요.”
“로져, 여기 폭슬.”
“라져! 여기 풉, 해산하겠습니다!”
1항사의 늘어진 대답과 함께 2항사의 절도 있는 외침.
바다인가, 강인가?
구분할 수 없이 넓은 라플라타강.
중국의 장강이 이랬다.
마치 바다같이 육지는 보이지도 않고 끊임없이 힘차게 밀고 내려오는 황토물!
수속을 마친 후 통선을 타고 선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육지를 밟는다.
부두 게이트에서 보이는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같은 작고 아름다운 부케부스 여객선 터미널.
그곳을 지나쳐 센뜨로로 향한다.
저기 이 도시의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4주라는 짧은 시간에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삐쭉 솟아나 보인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뜻이 좋은 공기라고 했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인상은 한여름 대낮의 눈 부신 햇살과도 같았다.
개구쟁이 시절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밥 먹으라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땟국물과 함께 이마와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고 하늘에서 내리쏘는 따가운 햇볕에 눈이 부셨던 기억이 난다.
그 익숙한 햇살의 반짝임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듯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낮은 눈부셨다.
높고 푸른 하늘, 맑은 공기와 함께.
대부분의 대도시는 많은 차량의 매연 덕에 공해가 심하다.
하지만 부에노스 인근 500여km 안에는 산이 없고 그저 대평원이다.
제아무리 도시의 매연이라 해도 바닷바람 한 번 불면 다 날아가 버린다.
대통령 궁 앞에 서서 에비따를 생각한다.
학생 때 가슴에 사무쳤던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떠올린다.
고2 땐가 반 친구가 영국 그룹 둘리스 내한공연 표가 있다고 해서 갔다가 들은 노래 중 하나가 이곡이다.
그 애잔한 노래에 어린 학생은 넋 놓고 듣다가 아르헨티나가 가슴 한편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어린 시절부터 상상으로만 품었던 그 나라 땅을 밟으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겠는가.
내 이런 날이 꼭 올 줄 알았지.
시내 산뗄모 거리로 향한다.
유럽의 한 도시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거리를 활보하는 노란색, 갈색 머리의 팔등신 미녀들.
가슴선이 얼추 반은 보여 상륙 나온 마도로스를 설레게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지하철은 이미 백여 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뭐 하고 있었을까.
막걸리 마시며 곰방대 물고 맴맴...
레꼴레따 옆의 노천 까페 중에 엄청나게 큰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동료 선원들이 꼰레체(우유가 든 커피)와 나랑하 쥬스(오렌지쥬스)를 시킨다.
나는 물론 와인으로 고!
우리가 살면서 갈구하는 행복은 막상 손에 잡았을 때가 아니고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행기를 처음 만든 라이트 형제 중 동생 라이트 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의외로 처음 하늘을 난 때가 아니고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할 때였다고 한다.
살아서 눈 떠 있는 오늘, 아름다운 이국의 항구에서 맛있는 와인 한잔하면서 산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며 행복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감사드리는 것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이렇게 우리 삶은 항해하는 배의 물꼬리처럼 덧없이 흘러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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