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금발 미녀와 데이트

부에노(조운엽) 2019. 10. 28. 06:55



La Plata 강변의 여인과 항해하는 화물선 

 

 

 

아르헨티나에서 블론드 미녀와 데이트

 

 

 

아르헨티나는 라틴어로 은을 뜻한다.

엄청난 곡물과 육류, 광물을 수출하여 한때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었던 나라.  

덩어리는 엄청나게 크고 자원은 무궁무진하나 인구는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더 적고 빈부 차이가 극심한 나라.

카스트로는 쿠바가 아르헨티나처럼 풍부한 자원과 먹을 게 넘쳐났다면 선진국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금의 아르헨티나처럼 개판으로 만들지 않았을 거라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현직 대통령이 사적인 일로 운전하고 가다가 접촉 사고가 나서 딱지 떼고 머리를 긁적이고 가고, 새벽에 혼자 조깅하다가 동네 꼬마 녀석이 저 아저씨 대통령 많이 닮았네 하니까 그 아빠가 '뭐, 비슷한 사람도 있겠지.' 하는 나라.

아르헨티나 국적은 죽어서도 포기가 불가능해서 외국에서 살면 프란치스코 교황도 네덜란드로 시집간 왕비도 항상 때 되면 여권과 비자를 갱신해야 하고 외국에서 태어난 자녀는 무조건 아르헨티나 국적이다.

학생 때 우리에게 신비롭게 다가왔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세기의 미녀 올리비아 핫세가 아르헨티나인이다.

 

레꼴레따의 카페에서 혼자 나와 부두 쪽을 향해 걷는다.

이렇게 땅을 밟는 것을 모든 선원은 염원한다. 

외항선을 타다 보면 가장 많이 기항하는 나라가 경제 대국이라 물동량이 많은 일본, 미국 그리고 캐나다이다.

그런데 일본, 미국에 대해선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다.  

뭐, 웬만한 사람들은 한두 번 다 갔다 왔고 별로 새로운 것이 없어서인지 글 문이 막힌다.

그리고 미국에서 너무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전에 미국에서 상륙 나갔던 선원 둘이 새파랗게 질려서 팬티 바람에 맨발로 귀선했다.

흑인들한테 잡혀서 속옷 하나 남기고 다 털리고, 한국 선원들이 양말 속에 돈을 넣고 다닌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서 양말 속에 꼬불친 백 달라짜리도 빼앗기고도 부족해서 권총을 머리에 들이대고 바지 지퍼를 내리더란다.  

한동안 밥도 잘 못 먹고 앓던 그런 선원들을 보고는 미국에 좋지 않은 앙금이 남아있다.

 

혼자 행복하게 육지를 걷다 보니 뿌에르또 마데로가 보인다.

배를 그렇게 타도 바다같은 강이 보이니 좋다.  

아주 오래된 곡물 싸이로가 있는 구 부두에서 다리를 건너니 큰 공원이 보인다.

고맙게도 맨땅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맨땅을 밟는다.

얼마 가지 않아 라플라타 강이 보인다.  

황톳빛 강가에 닻을 내리고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 ‘HAPPY LATIN’ 호.

대서양을 바라보며 나무숲 사이의 바위에 걸터앉아 담뱃불을 붙인다.  

혼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난다.

키가 크고 늘씬한 블론드 아가씨가 먼바다를 쳐다보고 서 있다.  

그녀 역시 약간 놀라는 시늉을 한다.

담배가 끝에까지 타들어 간다.  

발로 비벼 끄는데 금발 아가씨가 말을 건다. 

그대는 어디서 왔냐고?  

나는 저기 앞에 보이는 배의 오피시알(사관)이고 꼬레아노라고 답하자, 그녀가 꿈꾸듯이 말한다.

자기는 다나에 가르시아라는 학교 선생인데 자기 노비오가 외국에 나가 있어서 앤 생각날 때마다 저 바다를 쳐다보며 그를 생각한다고, 아마 당신도 자기와 비슷한 거 아니냐고 하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그래, 맞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걸 느낄 수 있지.

내 노비아는 저 대서양 건너 독일에 있다고, 들릴 듯 말듯 속삭인다.

 

머리카락을 태울 듯이 이글거리던 태양도 어느새 힘을 다해가고 있다.

후덥지근한 강바람이 가끔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둘이 숲 사이로 난 산책길을 걷는다.

작은 이구아나가 숲에서 도망갈 생각도 안 하고 언발란스한 두 인간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카메라를 갖다 대니 약간 몸을 움직여 포즈를 취해 준다.

다나에와 동시에 까르르 웃으니 그제야 혀를 날름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이 도심 한복판에 원시 동물이 인간과 같이 산다니...

 

서로 혼자만의 생각을 하며 오솔길을 걷고 있는 두 남녀.

다나에가 팔짱을 낀다. 

시계 속에는 거꾸로 도는 톱니바퀴가 반이다.

그게 맞물려서 시계가 돌아간다. 

어쨌든 얘들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벌써 팔짱을 낀다.

남희와 팔짱 끼는 데 몇 년이 걸렸던가?  

나와 남희가 늦은 거야, 아르헨티나 사람이 빠른 거야?

우씨, 더운데...  

그래도 이국 여인의 부드러운 팔이 싫지 않은 듯 발맞춰 걷고 있다.

그녀에게서 나는 향수인지 은은한 여자 냄새가 좋다.  

다나에가 담배를 입에 문다.

우씨, 나는 담배 피우는 여자의 빨간 입술을 보면 뽀하고 싶어지는데...  

그녀의 키에 비해 작은 머리를 덮고 있는 금발이 흘러넘치는 하얀 목이 내 눈높이다.

뽀하려면 발뒤꿈치를 한참 들어야겠는걸...  

혼자 발칙한 상상을 하며 공허한 미소를 흘린다.

 

말라가는 늪을 지나 도로로 나오니 건너편에도 잘 다듬어진 공원이 또 있다.

더위를 피해 공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다나에와 근처에 있는 그림 같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아사도와 초리소, 친추린을 시키니 빵, 빠빠스 프리타스(감자 튀김)와 치즈 등이 먼저 나온다.  

비노 띤또(적포도주)를 잔에 조금 따라준다.

향기를 코로 맡아보고 입안에 한 모금 돌려본다.  

와인을 삼키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부에노(좋다)라고 말하자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채워주는 웃어서 아름다운 모사(서빙녀).

영어와 손짓, 바디랭귀지로 이야기하다가 폭소를 터뜨리는 젊은 남녀의 화려한 저녁 만찬.  

항해 중에 한바다에 누워 꿈만 꾸던 것이 현실로 됐다.

 

잘 먹고 어둑어둑해져 레스토랑에서 나온다.

둘은 부두 쪽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약간 으슥한 곳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스페인어로 아모렌가 화장품 이름을 들먹이는 다나에.

발뒤꿈치를 오래 들었더니 엄지발가락이 아프고 다리에 쥐가 나려 한다.  

조금 더 걷다가 빨간 네온 불이 보이는 곳에서 다나에가 팔짱 낀 손을 잡아당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살아있는 청춘 남녀들만의 특권인가.

 

마도로스는 나그네이다.

우리는 집 떠나 다른 곳을 여행하게 되면 다 나그네가 된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에서 살 수 없다면, 결국 모두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

나그네는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언젠가 떠나야 한다. 

낯선 곳에서 누군가에 정을 주고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그네는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숙명처럼 이별의 고통이 따라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