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항에서 추억

부에노(조운엽) 2019. 10. 30. 06:27




추억의 몬테비데오항 

 

 

몬테비데오항에서 쌍코피 터진 추억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라플라타강과 우루과이강을 경계로 접해 있다.

지구에서 한반도의 대척점인 우루과이는 계절, 시간대 등이 모두 한국과 정반대다.

수도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한 적이 있다.

그때 같이 타던 조리장이 몬테비데오의 L 사범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설이라는 건 조금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

 

신혼이었던 L 씨가 독일에 취업 갔다가 여의치 않아 흘러 흘러 남미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남미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러가고 빈털터리가 되어 공원에서 먹고 자는 노숙자 신세까지 전락하였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그에게 우연히 그런 일이 생겼다.

 

어느 날 낡은 옷 가방을 베고, 해 저문 공원 벤치에 누워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궁리하며 잠을 청하는데 주위에서 웬 여자 비명이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가 고파 힘이 없는데 나설 일도 아니라 그냥 누워있었다.

그런데 점점 여자의 비명은 커지고 주위에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 나는 곳으로 가 보니 건장한 청년 세 명이 산책 나온 아가씨 한 명을 희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세뇨리따는 다급하게 ‘세뇰, 아유다메 뽀르 파보르!(신사 아저씨,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치고 이 왜소한 대한의 아들은 덩치로도 상대가 되지 않고 숫자 또한 열세 아닌가.

불량배 중 한 명이 다가와 꺼지라고 위협하는 걸 사타구니를 세게 걷어찼다.

뭐 다 아시다시피 제아무리 덩치가 크고 싸움꾼이라도 급소를 맞으면 힘을 쓸 수가 없다.

나머지 두 명이 욕을 하면서 달려들어 이 불쌍한 한국인을 조 패는데 학창 시절 태권도를 좀 배웠던 이 양반은 몸을 웅크리고 맞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또 한 놈 급소를 정확히 걷어차니 이놈 또한 괴성을 지르며 나자빠지지 않는가.

셋 중에 둘이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고 있으니 나머지 한 명은 당연히 전의를 상실하고 모두 줄행랑을 쳤다.

후환이 두려운 이 한국인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는데 밝은 곳으로 나오니 그 아가씨가 기다렸는지 불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가씨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옷 가방도 놓고 오고 딱히 갈 데도 없어 뭔 일인가 쭈뼛쭈뼛 따라갔더니 그녀의 집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의 부모는 이 가련한 한국인 노숙자에게 고맙다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안 통하는 말로 손짓 발짓 하다가 일단 먹을 것 챙겨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한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그녀의 아버지가 태권도 할 줄 아느냐 묻기에 당신 딸이 보지 않았냐고 했더니 자기 나라 뽈리시아(경찰)에게 태권도를 가르쳐달라나.

그녀의 아버지가 그 나라 경찰 간부였다.

 

이렇게 경찰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어 제자들이 하나둘씩 늘면서 대통령 경호원도 가르치고 군인들도 가르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니 제자들이 수없이 늘어나 그 나라 요직에 두루두루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나라 육군 장성이 자기 마에스뜨로인 L 사범에게 음식 대접을 하면서 소개할 여자가 있다고 결혼하고 싶지 않냐고 해서 사실 한국에 아내가 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며 왜 데리고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나라에서 사범 노릇 하고는 있지만, 사실 여권이 있나 영주권이 있나 꼼짝없는 불법체류자 신세인데 말이지.

그때 그 나라는 군부의 입김이 무척 셌던 시절이라고 한다.

육군 장성이 나서서 자기 사부님 여권, 영주권 처리하는 일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어느 날, 그 장성이 L 사범에게 공항에 같이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별 판을 단 차를 타고 공항에 갔더니 의장대가 늘어서 있고 군악대가 귀빈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높은 사람이라도 오는 모양이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장성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어럽쇼, 비행기 트랩을 밟고 웬 한복 입은 아줌마가 다소곳이 내리지 않는가.

군악대의 팡파르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 도열한 의장대 사이를 통과하는 여인의 모습이 낯에 익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니, 저거 내 마누라 아냐?”

혼자 눈을 비비며 아무리 봐도 꿈속에 그리던 아내의 모습이 턱하니 눈앞에 보여 꿈인지 생신지 모르고 뛰어가서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었다 웃었다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L 사범이 예전에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었던 그 세뇨리따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서 손뼉을 치고, 아버지인 경찰 대빵 등 그 나라 군경 요직에 있던 제자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로 환영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 옆에 처음 보는 꼬마 아이가 서 있는데자기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나이가 L 사범 한국 떠난 햇수와 같았다나.

한국을 떠날 때 임신 사실도 몰랐던 아들이었다.

 

타던 배가 몬테비데오 항에 입항했을 때 조리장의 입항 전보를 받은 그 L 사범이 우리 배로 찾아왔다.

반갑게 인사하고 도장에 놀러 가니 넓은 벽에 그 나라 신문이 도배되어 있었다.

신문에는 L 사범의 일거수일투족과 사진이 거의 매일 실려 있었다.

대통령이나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루과이는 17세기 이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브라질에 흡수되었다가 1828년 독립했다.

국토가 한반도의 8할 정도의 크기인데 인구는 사백만 명이 안 된다.

그나마 수도 몬테비데오에 반이 몰려 살고 있다니 얼마나 널찍하겠는가.

우루과이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지도상 커다란 이웃 국가들에 둘러싸여 우루과이가 매우 작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덴마크보다 5배나 큰 국토를 가지고 있고 일본보다 더 넓은 경작지를 가졌다.'라고 언급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낮은 구릉과 초원 지대로 세계적인 축산국으로 알려져 있고 축산물 수출이 90%이며 OECD 회원국인 그리스, 터키, 멕시코보다 잘 사는 편이라 한다.

이 나라는 오죽 산이 없으면 '산이 보인다.'라는 뜻인 Monte video에서 높은 곳이 해발 200m밖에 안 되고 제일 높은 산이 해발 501m라나...

우루과이는 인구도 적은데 축구는 잘 한다.

오래전이지만 월드컵 우승을 두 번이나 하고 우리나라 보다 한 수 위다.

몬테비데오항이 남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우리 원양어선의 전진기지가 되면서 수산업 분야의 교민이 약 200여 명 살고 있다.

 

이곳에는 여자와 남자 성비가 7:1이란다.

나라가 제법 사니 국가에서 대학교까지 무상으로 교육하는 데 반해 국내 일자리가 별로 없어서 남자들이 외국으로 취업을 많이 나가서 그렇게 되었단다.

그래서 남성들의 천국이라 할까, 혼자 사는 여자가 즐비하고 '사'자 직업을 가진 유능한 여인이 상대적으로 조금 부족한 듯한 남성을 데리고 산다.

부인은 일하러 나가고 남편은 집에서 요리하고 아이 보면서 정원이나 다듬고 지내는 백수가 많단다.

이곳 겨울에는 좀체 영하로 안 내려가고 추워봤자 살얼음이 겨우 얼 정도이다.

그런데 추위가 뼛골까지 시리다고 한다.

캐나다, 러시아 영하 2~30도 하는 곳에서 살다 온 사람도 이곳 추위에는 적응이 잘 안 된다고 한다.

겨울에 노숙자들이 저체온증으로 많이 죽는다.

현지인들이 겨울에 완전무장하고 다니는 이유를 알겠다.

 

몬테비데오에서 일주일 동안 하역하면서 매일 일과 끝나면 L 사범과 선원들이 함께 어울려 시내로 놀러 다녔다.

소고기가 껌값만큼이나 싼 나라에서 매일 잘 먹고 마시며 클럽에서 광란의 밤을 보내다 출항하니 세수하면서 쌍코피가 터졌다.

이 정도 놀아야 겨우 대항해시대의 마도로스 후배라고 할 수 있겠지.

 

‘남미 오래 살면 아무리 힘들어도 농담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괜찮고 먹을 게 넉넉한 남미에 오래 살면 마음에 여유가 있고 유머 감각이 절로 생기는 모양이다.




 

Te amo, Guadalupe Pine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