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뫼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꽈배기 같은 54층 건물 터닝 토르소
말뫼의 터닝과 통영의 웃음
'HAPPY LATIN' 호는 영원한 연인 남희가 숨 쉬는 독일을 향해 푸른 물살을 헤치며 도버해협을 지나고 있다.
도버해협은 영국과 프랑스 칼레 사이 제일 가까운 거리가 34km로 맑은 날은 건너편 해안이 맨눈으로 보인다.
대서양과 북해를 잇는 안전한 항로이기에 많은 배가 지나간다.
해저에는 터널도 뚫려 차들이 다닌다.
우리가 항해하는 지금 저 해저 밑에도 많은 중생이 운전하면서 자기 생각에 잠겨 오가고 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해협 사이가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조오련 선수 등 많은 사람이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
대리점에서 전보가 왔다.
함부르크 엘베강 어귀의 파일럿 스테이션 ETA(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도선사가 승선할 예정이고 BLG 자동차 전용부두에 바로 접안한다는 내용이다.
전보를 타이핑해 캡틴이 있는 브리지로 올라갔다.
전보를 보고 나서 배 항로에 마주 오는 배가 없나 확인하면서 캡틴이 물었다.
"국장, 전에 대한선박에 있었다고 했지요?"
"네, 코리안 아메시스트호에서 차석 통신사로 실습했었습니다."
내 대답에 전방을 주시하는 1항사를 힐끗 보며 캡틴이 말을 이었다.
"거기 한양호라고 있었지?"
"아, 제가 근무할 때 같이 타던 1기사가 한양호에 승선했더라고요."
"1968년에 그 배 인수할 때 울산이 난리 났었어요. 지금은 십만 톤 넘는 배가 널려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25,000t급 최대 화물선인 한양호를 대농그룹이 이탈리아에서 신조해 들여와 박 통이 자녀 세 명까지 데리고 와서 명명식을 하는데 TV, 신문에 나오고 대한 뉘우스에 애국가 다음으로 방영되고 말이야. 그 배를 율산해운에서 인수했지. 그 70년대 무서운 아이들에 대해 들어 봤소?"
캡틴의 물음에 1항사가 끼어들었다.
"아~ 당시 율산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나 마찬가지였죠."
27살이었던 신선호 씨가 율산실업을 창업해 불과 몇 년 만에 14개 계열사를 보유한 재벌로 성장해 한때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중동에서 넘치는 오일 달러로 건설 붐이 일어나 자재를 싣고 온 화물선은 많은데 부두는 작아 체선이 극심해지자 율산 관계자는 배 선실에 불을 질렀다.
하루 체선하면 수천에서 수만 달러가 날아가는데 그깟 방 한두 개 태우는 것은 껌값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화물선에 불이 나면 얼른 불을 끄고 우선 접안 시켜 화물을 하역했다.
불 지르는 것도 한 번이지 못 말리는 체선에 또 아이디어를 낸 게 월남전에서 용도 폐기된 상륙함 LST의 상륙 허가를 받고 영국 헬기를 임대해 육해공군 합동으로 화물을 하역하자 현지에서 대서특필 되고 그게 해운업계 전설이 되었다.
그러다 몇 년 안 가서 이런저런 이유로 부도가 나 망했다.
1항사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선장님, 잘나가던 율산이 망해 정말 안타까운 일인데요, 제 생각은 신화고 뭐고 간에 무역이면 무역, 해운이면 해운 하나나 잘하지 은행 돈 졸나게 갖다 쓰면서 왜 문어발처럼 다른 거까지 욕심내다가 감당 못 해 망하냐구요. 일본 애들처럼 장인정신으로 자손 수 대에 걸쳐 한 우물을 파든지, 듣기로는 그리스 선주들이 잘하는 게 호황 때 다른 데 투자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잘 꼬불쳐놓았다가 불황이 오면 그때 중고선을 헐값에 사고, 신조선값 내려가면 새 배 발주하고 해서 유동성 위기를 겪지 않고 견실하게 선박회사를 이끌어 간다고 하더라고요. 전 우리나라 재벌들 그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캡틴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빈말이 아니고 그런 마인드라면 1항사를 선박회사 사장 시켜도 되겠네."
선교에 있는 모두 배가 떠나가도록 웃었다.
120년간 도시를 떠받치던 조선소가 문을 닫고 실업률이 엄청 늘었다.
스웨덴 말뫼, 코쿰스의 골리앗 크레인은 해체 비용을 현대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넘어갔다.
이 사건은 세계 조선업의 중심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넘어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조선소가 폐쇄되어 수만 명의 실업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절망만 남았던 말뫼는 그렇게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말뫼시가 조선소 부지를 인수하여 건물을 지어 창업지원센터로 활용하고 신재생에너지, IT 산업 등에 과감하게 투자하면서 도시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친환경을 위한 시도가 새로운 성장동력이자 도시 경쟁력이 된 것이다.
2000년 덴마크 코펜하겐과 바닷길이 연결되는 외레순 다리가 개통되면서 일은 코펜하겐에서 하고 생활은 물가가 싼 말뫼에서 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것이 알려져 도시의 인구는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말뫼가 유엔환경계획의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면서 메이저 기업들이 말뫼로 본사를 이전하고 관광객이 증가하였다.
어떤 산업을 끌어올지 고민하지 않고 젊은 세대가 공부하고 시민들이 일하며 잘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놓고 시 당국은 이들을 위해서 도시를 정비하고, 사회안전망을 잘 만드는 데 주력해 에코 도시로 다시 살아난 것을 ‘말뫼의 터닝’ 또는 ‘말뫼의 웃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조선업 위기의 상징인 문 닫은 통영 신아조선소 부지가 말뫼를 모델로 글로벌 문화관광 허브로 다시 태어난다.
폐조선소의 상징물인 골리앗 크레인을 그대로 살리고 두 개의 슬라이딩 Dock에 바다로 향하는 풀과 하늘로 향하는 전망대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골리앗 크레인 상부에는 대형 시네마 스크린을 설치하고 작업장에는 공연시설과 야외관객석을, 지하에는 조선 관련 전시관을 만든다.
기존 별관과 본관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를 해 창업지원 시설을 조성한다.
통영의 관광자원을 활용해 외국인들의 휴양, 업무시설을 조성하고 지역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쉬고 즐길 수 있는 세계적 해양 도시로 만들 계획이다.
학교와 상업 리조트 시설, 휴양, 주거 공간은 토지를 분양해 민간기업이 참여하게 한다.
부지 인근 빈집은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로 만들 계획이다.
단지가 조성되면 운영과 건설 인력을 포함해 만이천여 명 정도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기대된다.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바다와 아름다운 자연, 문화 자원이 많은 곳으로 폐조선소 프로젝트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계획이란다.
Gracias a la vida, Violeta Pa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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