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항해일지 중 드디어 엘베강이 보인다

부에노(조운엽) 2019. 11. 12. 13:11




엘베강 등대를 통과하는 일본 NYK LINE 컨테이너선




드디어 엘베강이 보인다




내일이면 독일 함부르크항에 입항하기에 자동차와 중장비 실을 만반의 준비를 한 우리의 ‘HAPPY LATIN’ 호의 사관들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배에서 별 낙도 없는데 선원들이 먹는 것을 얼마나 밝혀요. 숟가락 놓자마자 다음 식사 메뉴가 뭔지 궁금해하고 말이오?”

우직한 보통의 마도로스와는 달리 박학다식한 안 선장님의 달변이 시작되고 모두 웃으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전에 그리스 1항기사와 혼승으로 타고 있을 땐데 말이지, 얘들은 양배추와 감자를 많이 먹나 봐. 우리 한국 선원들이야 김치만 안 떨어지면 다른 채소로 반찬 투정은 별로 안 하잖소. 조리장에게 양배추와 김치 좀 많이 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야.”

잠시 좌중의 초롱초롱한 눈들을 쳐다보며 아바나 시가에 불을 붙인 캡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조리장이 부식 주문할 때 평상시보다 훨씬 많이 시켰대요. 자기 깐에는 배려를 한 거지. 아, 그런데 부식이 올라올 때 감자와 양배추 양을 보더니 두 놈의 눈이 희뜩 하더니만 보따리 싸서 뒤도 안 돌아보고 하선해 버린 거야. 참, 내...”

1항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럼 무단 하선 아닙니까?”

“그거야 뭐, 선주가 즈그 나라 사람이니까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하겠지. 양배추와 감자를 그만큼 먹고는 일 못 하겠다는 거야. 돈도 싫다고 가 버리는 데 낸들 어쩔 거야?”

캡틴의 말에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이어서 기관장의 말이 이어졌다.


“양배추 말이 나오니까 걸프 전쟁 때 이란에서 입항 대기를 하고 있는데 배가 접안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쌀이나 고기는 당장 문제가 없었고 김치가 떨어져 가네. 대리점에 물어봐도 배추를 못 구한대요. 있어도 중동에서 배춧값 비싸서 우리 선원들 부식비로 사 먹을 수도 없을 거요. 할 수 있나? 영양가 많은 양배추를 사다가 조리장이 김치를 담갔지. 선원들이 며칠은 그럭저럭 먹더니 부원식당에서부터 구시렁 대기 시작했어. 급기야는 성질 더러운 젊은 갑판원이 밥 먹다 말고 양배추김치를 엎어 버린 거야. 쓰고, 질긴 이걸 먹고 어떻게 일하냐고. 조리장이 뭔 죄 있어? 성질이 나서 주방에 있는 칼을 들고나오고, 이 젊은 놈은 방화 도끼 들고 날뛰고 해서 말리느라 혼났네. 나중에 조리장은 자식 또래밖에 안 되는 놈한테 이게 뭔 꼴이냐고 펑펑 울어대고... 아이고~.”

기관장이 말을 마치자 1기사가 물어봤다.

“도끼 들고 설친 자식은 어떻게 됐나요?”

“말해 뭐하노. 도끼 춤춘 애들 치고 만기 채우는 것 봤어? 술 먹고 갑판장한테도 어영부영하다가 일본에서 강제 하선 됐지.”

기관장의 말에 1기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행히 왕복 차비는 얼마 안 들었겠어요?”

캡틴이 정색하며 끼어들었다.

“아니야, 1기사. 일본은 물가가 비싸서 비행기가 바로 연결 안 되면 오히려 미국, 캐나다에서 교대하는 것보다 더 들 수도 있다네.”


이야기가 길어지니 싸롱이 설거지를 마치고 와서 커피 한잔 하실 거냐고 물었다.

모두 O.K. 하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1기사가 말을 잇기를...

“저도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하역이 예정보다 한 달 더 늘어져 배에 고기가 떨어졌거든요. 그래서 조리장이 대리점 직원과 선식에 가서 냉동고기 박스를 보고 쓰여 있는 것은 한자 약어고 말은 안 통하니 뜯어 보니까 소고기 같은데 디게 싸더래요. 그래서 선원들 소불고기 자주 해주려고 왕창 실었죠. 그 당시 중국 와이후이 환율이 4위안 정도 할 때니 물가 쌌잖아요. 그런데 소불고기 맛이 좀 이상한 거예요.”

1기사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마시자 모두 재촉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1항사가 물었다.

“아니 무슨 고긴데? 이상한 고기라도 실었나?”

1기사가 눈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것이... 고기 색깔만 붉었지 토끼고기였어요.”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이어 캡틴이 말했다.

“미쳐~ 그러니까 배에서 일주일 주메뉴가 소 돼지 닭, 소 돼지 닭, 생선 이렇게 돌아가는데 1기사 탄 배는 토끼, 돼지, 닭으로 돌았구먼. 하하하~”

이어지는 1기사의 어눌한 말.

“지금도 속에서 니글니글한 토끼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사관 몇은 웃다가 앉은 자리에서 넘어갔다.


조용히 듣고만 있는 나에게 캡틴이 말을 붙인다.

“어이~ 국장! 오늘따라 말도 없고 왜 그래?”

“예? 별일 없습니다.”

“얼굴에 다 쓰여 있구먼 그래, 뭔 일인데?”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나에게 캡틴이 재차 물었다.


탁자 위의 먹다 남은 커피잔을 한쪽으로 치우고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말하기 좀 쑥스러운데, 아니 제 앤이 연하의 독일 기자하고 부비부비하고 난리에요.”

“흠~ 국장 애인 남희 씨가?”

캡틴의 나지막한 소리에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면 무슨 짓을 한들 어찌 알겠습니까만, 하필 어제 전화를 했는데 그놈하고 좋아서 끌어안고 어쩔 줄 모르더군요.”

모두 적당한 말을 못 찾아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자 캡틴이 나를 쳐다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한국 같은 개도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독일 같은 선진국은 거의 변화가 없을 걸세. 어제나 오늘이나, 뭐 또 내일도 마찬가지겠지. 우리 선원들도 바다에서 배 속도만큼이나 느린 삶을 살고 있지만 말이야. 그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도 한국에서 정신없이 핑핑 돌아가다가 독일에서 좀 심심할 걸세. 어이, 국장! 그래서 애인과 어떻게 할 건데?”

“네, 일단 만나 봐야죠. 어쩌나...”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기관장도 혼잣소리같이 낮게 말했다.

“사람 천성은 잘 변하지 않지. 그런데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잖소. 정말이지 여자 마음은 남자들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야. 사랑은 상대적인 관계라 좋은 상대와 원만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큰 노력을 해야 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실망하고 언제 돌아설지 모르지. 국장이 잘 생각해서 처신하겠지만...”

이 순간도 쉼 없이 엔진이 돌아가는 ‘HAPPY LATIN’ 호의 우현 멀리 엘베강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 출신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너무 집착하면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면 우리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흥미, 욕구와는 관계없이 우리의 현실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써놓았는데 번역이 시원찮은 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얼른 자기 주제 파악하여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이야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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