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과 불황이 왔다 갔다 하는 조선산업
불모지에서 조선 수주 1위 신화
다음 항구가 정해졌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자동차와 중장비를 싣고 캐나다 핼리팩스, 미국 보스턴, 뉴욕, 뉴올리언스 그리고 도미니카공화국에 풀어주란다.
오 뽀르또항에서 숯을 다 하역하고 일단 외항으로 배를 뺐다.
숯 먼지로 온통 검게 변한 'HAPPY LATIN' 호는 도선사가 내리자 선수를 북으로 돌려 항해하며 선내 외 물청소를 했다.
북대서양의 싱그러운 바닷바람과 파도를 만나니 이제 숯가루 미세먼지로부터 해방되어 좀 살 거 같다.
청소가 끝나면 자동차를 실으려고 선창의 카 덱을 내려 조립해야 한다.
함부르크까지 1,300여 해리를 우리 배가 15노트로 나흘은 가야 하고 작업이 하루 만에 끝날 일은 아니기에 쉬엄쉬엄 일한다.
배에서는 안전이 최우선이라 하우스 마린 한가운데에 빨간 글씨로 크게 'SAFETY FIRST' 또는 'NO SMOKING'를 써놓고 모두 안전에 유의한다.
한바다에서 작업하다 선원이 다치기라도 하면 육상과 달리 배 안에 의사가 없어 당사자고 책임자고 모두 난감하다.
주방에서 저녁 메뉴로 숯가루 먼지를 희석하라고 돼지고기 로스구이를 준비했다.
양상추와 고등어 무조림도 나왔다.
캡틴이 수고했다고 헤네시 꼬냑 한 잔씩 따라준다.
향이 좋은 꼬냑이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정박 중 쌓인 피로가 좀 풀리는 듯 유쾌한 나른함이 온다.
삼겹살이 언제부터 우리 국민 음식이 되었을까?
어렸을 땐 그냥 돼지고기 사다가 엄마가 양념해서 볶아주면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뿐이다.
80년대 소득이 늘고 육류 소비 또한 많이 늘어 탄광이나 막노동하는 사람들이 영양보충 겸 마신 먼지를 씻어낸다고 먹었고,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널리 보급되어 전국적으로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것 같다.
삼겹살 소비가 느니 부족한 것은 수입하고 남는 등심, 전지 부위는 수출하는 모양이다.
서양 사람들은 아침 메뉴로 세 겹 살 부위로 만든 베이컨을 즐겨 먹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침부터 삼겹살은 잘 먹지 않는 거로 알고 있다.
아니다, 전 천하장사 강호동 씨는 아침부터 공포의 삼겹살 구워 먹는다고 소문났더라.
돼지고기를 잘 먹는 중국 사람이 전 세계 돼지고기 생산과 소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돼지고기가 중금속을 해독하여 배출하는 효능이 있다는 것은 연구논문으로 이미 밝혀졌다.
삼겹살 생고기를 마늘, 김치 등과 함께 불판에 구워서 상추, 깻잎, 파절임, 고추, 양파 등의 채소와 쌈장, 참기름 소금 등의 양념과 같이 먹고 난 후 밥을 볶아먹으니 고른 영양 섭취에도 좋은 것 같다.
글쓴이는 언제부턴가 상추쌈을 싸 먹지 않고 고기, 야채, 양념을 따로 먹어 각자 맛을 느끼고 새우젓과 고추냉이를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한다.
캄보디아에서는 삼겹살을 팔지만 기름 싫어하는 사람은 선호하지 않아 일반 전지나 가격이 비슷하다.
보통 1kg에 18,000리엘, 달러로 4.5불 한다.
당직 교대를 마친 1항사와 1기사가 까뮈 한 병을 가지고 사관 식당으로 들어왔다.
모두 반갑게 맞이한다.
1항사가 앉으면서 말한다.
"좌현에 현대상선 배가 하나 지나가데요. 통화해 보니 동기가 1기사로 타고 있더라고요."
"반가웠겠구먼. 어이, 지금은 우리나라가 조선 수주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지만 어디 처음부터 그랬나. 옛날에 현대 정주영 회장이 조선 불모지에서 큰일을 해냈지."
캡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60년대 말 정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할 산업이 필요해 현대 정 회장에 조선소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1971년 정 회장은 초가집에 갯벌만 보이는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영국 바클레이 은행에 갔다.
이미 미국, 일본은 한국이 조선소를 만든다는 것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은행에서 차관을 빌려준다 했으나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에서 그동안 실적이 없으니 선박 수주 계약서가 있어야 사인해주겠다고 해 수소문 끝에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가 싼 배를 사러 다닌다는 정보를 듣고 파격적인 가격으로 26만t급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해서 차관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건설 인력 선배들이 고생 끝에 2년 만에 조선소와 배를 만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다 만든 유조선 한 척은 그리스에서 인수했으나 또 한 척은 문제가 많아 인수하지 않자 현대가 맡아 코리아 배너호로 운항해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 상선이 생겼다.
정 회장이 차관 얻으러 다닐 때 5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 그림으로 관계자를 설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데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스웨덴 말뫼의 대형 조선업체 코쿰스가 망해 정리할 때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골리앗 크레인을 인수할 유럽 기업이 없어 현대중공업에 막대한 해체, 운송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팔았다.
말뫼에서 해체해 고철로 팔았으면 1불은 더 남았을 텐데...
2002년 조선 도시 말뫼 주민들은 크레인의 마지막 부분이 해체되어 배에 실려 바다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없이 아쉬워했고, 스웨덴 국영방송은 그 장면을 장송곡과 함께 내보내면서 ‘말뫼의 눈물’이라고 했다던가.
현대중공업은 이 크레인을 싣고 와 조립해 다시 운전하는데 모두 220억 원이 들어갔단다.
이 크레인은 현대중공업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육상 건조 공법을 성공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 미포조선이 갯벌에 기적을 만들고 실로 십몇 년 만에 세계 신조선 수주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기록하기도 했다.
오일 쇼크로 전 세계 경제 위기가 한창일 당시 중동에서 우리나라에 건설 수주가 들어왔는데 굳이 거기까지 가서 일하려는 사업자가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정 회장은 바로 중동에 가서 현지 조사를 해보니 중동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쉬는 날이 없어 공기를 단축할 수 있고, 건축자재 중 모래가 많이 필요한데 사막에 지천으로 있어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유조선이 중동 갈 때는 비싼 식수를 싣고 가고 돌아올 땐 석유를 싣고 오면 될 거라는 생각에 사업 추진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산 간척지 공사 당시 막바지에 남은 연결할 곳 매립이 거센 물살에 공사가 지연되자 폐선할 23만t급 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살을 막아 이틀 만에 매립하여 공사자금 290억 원을 줄인 공법은 외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일명 유조선 공법 또는 정주영 공법이라고 한다는데 우리는 돌아가시기 전에 무엇으로 이름을 남길까.
자식 농사를 잘 짓는 것도 큰일 중 하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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