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BLG 자동차 전용 부두
개선문을 통과하는 여장군처럼 나타난 남희
독일 출신 레마르크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쓴 장편소설 개선문에서 ‘노르망디의 바람 불고 오래된 과수원에서 무더운 여름과 시원한 가을 햇빛을 받은 칼바도스여,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는 네가 필요하다.’라고 술병에 속삭이며 칼바도스를 즐겨 마시던 주인공 라비크 그리고 애인 조안나는 라비크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늘 그 앞에서 칼바도스를 마시며 그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주요한 교두보 및 격전지가 칼바도스 주였다.
프랑스 북서부로 포도가 나지 않아 칼바도스 지역에서 나오는 사과로 만든 40도 정도의 증류주가 칼바도스이다.
세계적인 와인과 꼬냑, 알마냑 지방에서 나오는 포도로 만든 브랜디가 넘쳐나는 프랑스에서 칼바도스는 독하지만, 음미하지 않고 한 번에 털어 넣어 마시는 술로 알려졌다.
술을 비롯해 그 어떤 것도 음미할 여유가 없는 혹독한 시대의 상징이다.
브랜디는 포도나 과일주를 증류해서, 위스키는 곡물을 증류해 만든 술이다.
개선문의 주인공 라비크는 베를린의 큰 병원의 의사였으나 유대인을 도와준 죄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탈출하여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다 파리의 뒷골목에서 무면허 대리 의사로 호구지책을 한다.
따뜻한 인간성과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 그는 비정한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중산층 시민에서 떨려나 내일을 알 수 없는 허무한 나날을 보낸다.
마찬가지로 떠돌이 신세인 여배우 조안나를 만나 사랑했으나 남편이 쏜 총에 맞아 죽어가는 그녀를 살리지 못한다.
‘사자는 영양을 죽이고 거미는 파리를 죽이며 여우는 닭을 죽이지. 그런데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싸우고 죽이는 유일한 것은 인간뿐이다.’라는 말에서 개인이 겪는 전쟁의 공포와 불안, 권력의 광기, 복수 따위를 간접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독불전쟁이 일어나고 불법체류자인 주인공은 다시 붙잡혀 다른 사람과 함께 트럭에 실려 가는데 에투알 광장 주위 사방에 조명이라곤 없어 너무 어두워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고 라비크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런데 그 어둠을 밝혀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영화 개선문에서 여주인공 조안나로 출연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죽어갈 때 라비크는 ‘당신은 늘 나와 함께였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나,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을 때나... 당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했어요. 당신은 내게 빛이었고 감미로움이었고 또한 고통이었어요. 당신이 험하지만 이 좋은 세상에서 나를 살아가게 한 거요. 조안나,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충분치 않아요. 사랑은 훨씬 더 큰 거예요.’라고 고백했다.
개선문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과 병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건축물로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 개선문 중 가장 큰 것이 나폴레옹이 세운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다.
하지만 정작 건설을 명령한 나폴레옹 본인은 생전에 개선문을 지나지 못했다.
그는 죽어서야 유해가 개선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파리는 거의 평지이고 건축물의 고도를 제한해서 언덕 꼭대기에 우뚝 솟은 높이 50m의 개선문에서 에펠탑을 비롯해 파리 시내를 다 볼 수 있다.
개선문 아래엔 무명 용사의 무덤이 있고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365일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개선문 주변 바닥엔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프랑스 군인을 위한 동판도 있다.
함부르크 항의 BLG 자동차 전용 부두는 광석 부두에 인접해서 먼지가 좀 난다.
여기서 자동차 일부를 싣고 브레머하펜에서 자동차와 중장비를 더 실을 예정이다.
전 출항지가 밀입국자가 많은 아프리카 아닌 이상 유럽에서 입항 수속은 대부분 서류만 제출하고 금방 끝난다.
이제 얼른 정리하고 남희에 연락해야지.
그런데 어쩐다.
그녀는 바빠서 못 온다고 하고 내가 찾아가야 하는데 랑데부를 어디서 하지.
입항하고 전화한다고 했으니 기다릴 텐데.
아,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 거야.
광석 먼지 때문인가?
아무리 바빠도 일단 하나씩 처리하자.
우선 대리점 직원이 갖고 온 선원들 편지부터 나눠줘야지.
아이고, 다들 통신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네.
시간 절약하기 위해 선원들 편지를 얼른 부서별로 나누어주었다.
자, 이제 하나 처리했고...
그다음, 선원들 상륙 수당을 지급해야지.
기관부 조기원 윤 씨가 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한다는데.
학교 마치고 집에만 처박혀있다가 배를 늦게 타서 또래들은 벌써 진급해 급료를 많이 받는데 아직 말단으로 일하면서 이까지 아프다니 얼마나 서러울까.
하긴 조기장 하다가 젊은 사관들 하는 것이 눈꼴 시다고 쉰 넘어 공부해 면허 따서 3기사를 하는 의지의 한국인도 있는데.
이왕 치과 가는 것 스케일링도 해주라고 해야겠다.
그까짓 것, 선주에게 벌어주는 돈이 얼만데 겨우 돈 몇십 불하는 거로 뭐라 하겠나.
병원 진료 요청서는 이미 작성해서 캡틴 사인을 받아 놓았다.
통역으로 따라가야 하는데 영어 좀 하는 3항사에게 육지 바람 좀 쐬고 오라고 해야겠다.
독일 오면 제일 바쁜 사람 중 하나니까 이해하겠지.
부식은 언제 들어오려나?
검수해야 하는데.
입출항할 때마다 반복하는 익숙한 일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점검하면서 처리하는데 평상시보다 허둥대는 것 같다.
마지막이 아닌 달 11월의 함부르크는 오후 4시인데도 벌써 어두워진다.
분주하게 업무처리를 하고 캡틴한테 얻은 아바나 시가를 입에 물었다.
애고, 독해!
기침하다가 거울을 본다.
며칠 수염을 안 깎고 샤워만 해서인지 터프해 보이지만 내가 아닌 것 같다.
이를 어째.
밀어, 말아?
젠장,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는 남희의 말.
‘나이 어린 독일 기자가 나를 부둥켜안는데 며칠 수염을 안 깎았는지 까칠한 게 아주 죽음이다. 하마터면 지릴 뻔했다.’고...
독한 시가 연기에 한쪽 눈을 찡그리며 또 망설인다.
깎을까, 말까?
그래, 나는 나대로 가자.
좋은 건 배우더라도 내 색깔은 유지하면서 살자.
남희가 아름다운 것은 젊고 그녀만의 특유한 매력이 있는 거지 효리 같이 분장한다고 더 예뻐지는 건 아니지.
어쩌다 생각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블론드 아가씨 다나에와 달콤했던 시간도 세월이 지나니 그저 일장춘몽일 뿐이잖아.
내가 움켜쥐고 싶다 해도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어.
캡틴이 말씀하신 대로 껍데기만의 소유는 불행한 삶이잖아.
내가 잘하는 것 있잖아.
그냥 내비도!
물 흐르는 대로 가자.
구름에 달 가듯이...
반쯤 남은 시가를 눌러 끄고 세면기 앞에서 하얀 쉐이버 거품을 얼굴에 바르고 면도기를 집어 드는 순간 방문 밖에서 소란한 말소리와 배에서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렸다.
노크 소리에 대답하자 문을 벌컥 열고 개선문을 통과하는 여장군처럼 소리치며 들어오는 아가씨.
“야~ 짜샤!”
아니, 이게 누구래?
바쁘다더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희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코와 입에서 하얀 수증기 바람을 내뿜으면서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못 찾고 웃통을 벗은 채로 하얀 거품을 얼굴에 떡칠하고 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
그리고 문밖에 서 있는 하얀 스즈키 우주복 차림의 1항사와 훤칠한 키에 얼핏 봐도 잘생긴 금발의 멋쟁이 독일 청년이 남희 가방을 들고 꼿꼿이 서 있다.
군복만 입혀놓으면 틀림없이 영화에서 본 독일 장교감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과 같았을까...
변한 건 남희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난 남희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스러운 네 모습이고 네 안의 너만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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