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항의 밤
검게 젖어가는 ‘HAPPY LATIN’ 호
“어~ 국장님. 아직 안 나가셨네? 다른 부두에 있는 한국 배에서 책하고 비디오테이프 바꾸러 왔어요. 안 바쁘시면 좀 도와주실래요.”
정박 당직 중인 동갑내기 3항사가 현문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래요. 당직이 우선이니까, 그 선원들 오라고 해요. 어느 회사요?”
“범양상선의 ‘오션 노블’ 호라고 하던데요.”
이렇게 외국에서 한국 배를 만나면 선원들이 서로 놀러 가기도 하고 책과 비디오테이프를 바꿔보기도 한다.
남희에 잠깐 기다리라 하고 다른 배 선원들을 데리고 부원 휴게실로 갔다.
그리고 가져온 책과 비디오테이프 수만큼 바꿔주었다.
그 배 선원 중 한 명이 자기 배 캡틴이 내일 시간 되면 싸롱 사관들 마작하러 오시라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캡틴께 전해주겠다고 대답했다.
다시 돌아온 독일 기자가 현문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얼른 현문으로 나갔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내가 묻자 ‘예스 아이 캔.’이라고 대답하기에 다시 말했다.
“나이스 투 미츄, 아임 조.”
그 잘 생긴 독일 청년도 얼른 표정을 고치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이스 투 미츄 투, 아임 막스.”
악수를 하는 두 사람의 눈에 힘이 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 크다.
‘너, 왜 이렇게 잘 생기고 키도 큰데?’라고 묻자 독일 청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피터 팬처럼 만만치 않은데, 뭘...”
“퍽 유, 자네야말로 피터 팬 증후군이구먼.”
당직을 서던 3항사가 다시 들어오며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이래요. 별일 없습니까, 국장님?”
“아, 몰라요. 간다고 헤어졌는데 지금 다시 왔길래 정식으로 인사하는 중이요. 쓰가발 놈이 나보고 독일판 맹구 같다나.”
3항사가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썩소를 짓고 도로 나갔다.
함부르크항의 밤은 더 깊어지고 밤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잠자코 가랑비가 오는 검푸른 바다 야경을 바라보던 남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막스! 너 왜 안 가고 다시 왔는데?”
그 청년은 잡은 내 손을 놓고 남희에 애절하게 말했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나 지구를 따라 도는 달은 정해진 데로 가. 이미 우리의 삶도 다 길이 정해졌다고 생각해. 다만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지.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헛수고야. 나미는 나의 여자가 될 수밖에 없어.”
막스의 열정적인 말에 남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건 아니지. 독일인인 너의 사랑은 그럴지 몰라도 난 안 그래. 난 이미 나를 이리로 오게 만든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자기 삶을 망쳐버린 여자야. 그래서 그녀를 증오하고 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막스, 너 알지? 내가 전에 말한 ‘전’이라는 한국 여자.”
막스가 ‘야’라고 대답하자 남희는 나지막한 어조로 이어갔다.
“내가 하는 말을 막스는 잘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면 네 삶은 더 행복해지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난 고등학생 때 이미 너희 나라 작가 루이제 린저, 피터 한트케 그리고 토마스 만 등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알려준 이 중 한 명인 ‘전혜린’이라는 사람에게도 열광하게 되었고, 그런데 그녀는 결국 편견과 따돌림에 더 싸워보지도 않고 자기 인생을 포기했어. 그런 그녀가 안타까워서, 아니 미워서 나는 내 책상 앞에 ‘홀로 당당히 서자!’라고 써 붙였고, 독일 특파원 자리가 나서 얼른 왔지. 몰라~ 내 독일어가 서툴러서 네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난 그래. 개도 안 물어가는 제도, 윤리...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고정관념, 편견과 싸우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야무지게 말하던 남희가 잠시 멈추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 좋아! 그런데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또한 하고 싶은 일이 많아. 그래서 아직은 어디에 매이고 싶지 않아. 옆에 있는 내 동기도 마찬가지야. 그를 학생 때부터 좋아했지만, 나는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몸이고 나로서 일생을 마칠 사람이기에 시간이 아까워. 이대로 흔적 없이 사라질 순 없잖아?”
막스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뭔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고동색 코르덴 상의 안에 있는 것을 꺼내서 남희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미! 너의 한국 애인과 오랜만에 만났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나는 갈게. 누가 뭐라든 나는 나미를 사랑해. 그리고 가다 생각해 보니 저녁에라도 비행기를 예약하지 않으면 아침에 표를 못 구할 거야. 방송국 카드로 예약했어. 거기 있는 전화번호로 확인하고 타고 와.”
다시 나를 쳐다보며 손을 내미는 막스.
나도 막스의 길고 하얀 손을 잡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이스 투 해브 멧 유, 굿 럭 투 유.”
내 말에 막스가 대답하며 돌아섰다.
“좋은 시간 되기를, 그리고 나를 기억해.”
뮐러가 쓴 ‘독일인의 사랑’도 난해하지만, 운명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막스도 역시 독일인다운 생각이다.
개뿔,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갖다 붙이긴...
현문 앞에서 서성이며 우리를 지켜보면서 당직을 서던 3항사가 막스의 마지막 길을 안내했다.
우리는 잠시 후에 우산을 쓰고 함부르크 BLG 자동차 전용 부두길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시내로 가려면 차를 타야 한다.
싸늘한 수은등에는 여전히 빗방울이 을씨년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우리 어디 가서 시나몬과 바질이 든 따뜻한 와인 한잔할까?”
남희의 가라앉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밤하늘에 ‘HAPPY LATIN’ 호는 검게 젖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어둠을 두려워한다.
그게 카타르시스가 될 수도 있지만...
스페인, 포르투갈 문화권에서는 검은 배를 ‘Barco negro’라 한다.
옛날 어느 바닷가 마을에 한 부부가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살았다.
어느 날 고기잡이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서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눈에 수평선 너머로 무엇인가 보였다.
그것은 분명 남편의 배였다.
오랜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친 아내의 눈에 반가운 눈물이 맺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남편의 배...
그러나 그 배에는 검은 돛이 달려 있었다.
그 검은 돛이란 바로 남편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들리는 애잔한 기타 반주는 포르투갈 기타(Guitarra Portuguesa)로 2겹 6조 12줄로 일반 기타와 조금 다르다.
이 노래는 보통 Guitarra Portuguesa와 클래식 기타 비올라 두 기타로 반주한다.
리스본 빈민가의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십 대 시절 항구에서 낮에는 오렌지 행상을 했고 밤에는 선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그녀는 방년 19살 때 맨발에 검은 망토와 숄을 두르고 신들린 듯 ‘바르꼬 네그로’를 열창하며 파두의 전설이 되기 시작했다.
'파두'는 어원이 라틴어의 'fatum(숙명)'이라고 한다.
어원대로 주로 숙명, 고난, 절망, 죽음 등을 주제로 노래한다고 한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 파두를 들으면서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그녀가 짧지 않은 생을 마쳤을 때 포르투갈 정부는 사흘 동안 애도의 날로 정해 전 국민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국민 가수였다.
그만큼 그녀가 포르투갈 문화와 대중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의 딸 Dulce Pontes도 유명한 파두 가수인데 그녀가 부른 Cancao do mar(바다의 노래)가 헤라 화장품 CF 음악으로 나와 우리나라에도 좀 알려졌다.
Barco Negro, Amalia Rodig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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