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재 톤수 15만 톤급 컨테이너도 들어가는 호치민 티바이강
천 년 전쟁을 버틴 베트남
호치민의 티바이강은 대형 컨테이너 선박도 들어갈 정도로 강이 깊다.
부산 컨테이너 부두에도 큰 컨테이너는 배 밑바닥이 닿아 쉽게 못 들어온다.
다만 이 깊은 강 때문에 베트남 기술로는 다리를 놓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베트남은 공산당의 1당 독재국가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로 간다.
인구 1억에 자원이 많아 성장 가능성이 아주 큰 나라이다.
중국이 인건비가 오르고 무역전쟁으로 관세 폭탄과 온갖 갑질 등으로 외국 공장들이 베트남이나 주변 동남아 국가로 옮겨가고 있다.
심지어 중국 기업들마저 인건비가 싼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다.
베트남 사람은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 생산성이 주변 국가보다 높다고 한다.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중국 서쪽에 있는 베트남을 침략했다.
그래서 천여 년간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군신 관계였던 베트남은 10세기경 혼란했던 중국과 싸워 이겨 독립 왕조가 세워졌다.
그 후로 또 천여 년 가까이 중국과 싸웠다.
베트남은 천하무적이었던 몽골과 세 차례 전쟁에서도 물리쳐냈다.
또다시 명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도 게릴라전으로 쫓아냈다.
프랑스의 침략으로 마지막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장장 천 년 동안 베트남은 외세에 무릎 꿇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 버텼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에 대들어 맞짱 뜨기도 했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을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침공하여 베트남 괴뢰 정부를 세웠다.
거기에다 일본은 베트남인을 탄압하면서 전쟁 물자까지 강제로 빼앗아갔다.
그리고 베트남 여인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
태평양 전쟁에서 베트남은 일본군에게 엄청난 식량 수탈을 당하면서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기근을 겪었다.
결국 베트남인들은 일본에 강하게 저항했다.
전후 일본이 베트남에 전쟁배상금 140억 엔을 물었다.
이후에도 프랑스, 미국, 중국 등 강대국과 전쟁을 치러 그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베트남에서는 그야말로 제국의 무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4년 프랑스는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호치민군에 박살 나 베트남이 독립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남북전쟁 중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하였다.
미군이 엄청난 군사력으로도 월맹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고전하여 많은 군인이 전사하고 자국 내 반전운동과 전비 등의 문제로 견디다 못해 월남에서 철수하였다.
1979년에는 캄보디아를 일시 점령하였고, 베트남을 길들이려는 중국의 침공을 여학생까지 총 들고 참전하여 물리쳤다.
하여튼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근성의 민족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지금도 베트남을 만만치 않게 여기며 베트남 또한 중국에 질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승전한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원하는 호치민과 싸웠다.
2차 대전 종전 후 베트남에 들어온 중국 국민당 군대를 프랑스 정부가 협상해 철수시켰다.
인도차이나반도를 장악한 프랑스는 북베트남군을 도시지역에서 몰아내 호치민군은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마오쩌둥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고 북베트남군을 지원하여 호치민은 베트남 일부와 중국의 국경지대를 장악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라오스와 베트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에 공수부대를 보내 요새를 건설하고, 이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배치했다.
그런데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어 고립된 지역이었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한숨 돌리고 나니 북베트남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호치민은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 이상의 전황을 만들었다.
북베트남군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압도적인 포병 화력으로 프랑스 방어진지를 순식간에 초토화했다.
동시에 비행장에 포격해 활주로가 파괴되어 비행장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 지원은 낙하산으로만 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 조종사들이 대공포에 맞을까 봐 높은 데서 투하하여 회수율은 극히 낮았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탄약이 부족했고, 나중에는 총검과 수류탄만으로 싸우기도 했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월맹군의 공세에 분전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 부족해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깨졌다.
현장 지휘관은 전투가 끝났다는 최후의 무전을 보내고, 사이공의 사령부는 모든 물자와 무기를 파괴하고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혔고, 정글로 도망간 수백여 명만 나중에 구조되었다.
훗날 프랑스로 돌아간 포로는 고작 삼천여 명뿐이었다.
약 두 달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만여 명이 전사하였고 북베트남군도 이만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있었지만 호치민이 이긴 전투였다.
이로써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한다.
더 전쟁을 지속할만한 인원과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 전투로 커피, 고무, 향신료와 설탕 등 많은 자원을 착취하던 중요한 식민지를 잃게 되고 8년여에 걸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그 막을 내린다.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남이 사실상 독립하자, 프랑스의 다른 식민지에서도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베트남에서 군사력을 소진하고, 막대한 전비 투입으로 경제가 엉망이 된 프랑스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 식민지들의 독립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로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가 무너졌다.
이렇게 베트남에서 손을 뗀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한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함께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군대가 월남에 파병되어 월맹을 상대로 싸웠지만, 월남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인 베트콩에 고전하게 된다.
이는 월맹을 지원하던 소련, 중공과 전면전을 피하고자 미군이 제한적인 작전만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었다.
그러나 베트콩이 사이공에서 미 대사관을 폭탄 테러해서 이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와 본격적인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대규모의 병력을 보냈고 라오스, 타이,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와 우리나라가 전투병을 파병하고, 대만 등 다른 자유 진영 국가들은 비전투병 등을 보냈다.
중국과 소련, 북한 등 공산권 국가들은 무기나 특수부대 등을 월맹에 지원하였다.
미군은 월맹군이 보급로로 이용하는 약소 중립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고, 사용된 폭탄의 양은 태평양 전쟁 때 쓴 폭탄의 양보다도 몇 배는 많다고 한다.
그래도 호치민 루트가 폐쇄되지 않자 열 받아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침공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폭격 일지를 조작하고 언론을 통제해 자국민에게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민의 반전 여론이 거세졌다.
1968년, 월맹군과 베트콩이 설 연휴 동안의 휴전 기간에 월남 주요 대도시에 미리 잠입한 병력으로 동시다발적인 선제공격을 했다.
베트콩들은 월남의 주요 기관들을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처참하게 당했다.
그러나 주월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생중계가 되었다.
이 구정 대공세에 미국 대사관에 들어간 20여 명의 베트콩 전사가 베트남 전쟁의 역사를 바꾸었다.
미 지상군이 월남에 상륙한 시점부터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에 미국민은 의문을 품고 반전 여론이 거세졌다.
결국 내 가족과 젊은이들을 더 희생시키지 말라는 반전 운동과 여론에 밀려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고 미국의 징병제도 폐지된다.
그리고 미군 철수 이 년 후 월남은 고전하다가 결국 월맹에 패망하였다.
한국군은 육군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와 수도사단 맹호부대, 그리고 해병대 청룡부대가 주축이었다.
해군 UDT도 파병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5만여 명의 적은 인원으로 참전해 잘 싸운 편이었다.
그러나 국군이 아무리 잘 싸웠다 해도 파병으로 전쟁의 전체적인 구도에 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참전은 비록 장병들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에너지가 되었다.
한국군의 용감함과 대 게릴라전법, 대민 심리전 등이 가난한 나라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타임스지는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월맹 지휘본부는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따이한군과의 교전은 무조건 피하라.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 군인이라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런던타임스는 한국군이 월남 전역을 맡았거나 한국군의 전술을 채택했다면 벌써 승리로 끝났을 전쟁이라고 논평할 정도였다.
희망과 열정이 있는 나라에 서방에서 제 발로 찾아와 차관을 주었다.
당시 현대건설, 한진상사, 대우실업, 금성전자 등 국내기업들이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으로 베트남전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부수적 소득이 쏟아지는데 미국의 후원과 외국 투자가 물밀 듯 들어왔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이 되었다.
일본은 전범국이라 파병은 못 하고 대신 전쟁물자를 지원하였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막대한 군수물자를 팔아, 파병한 한국보다 더 큰 돈을 벌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6.25 전쟁으로 크게 성장한 일본경제는 베트남 전쟁으로 다시 전쟁특수를 누리면서 1980년대 거품경제의 바탕이 되었다.
베트남인은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무례하게 대하면 칼 들고 달려든다.
어려서부터 민족주의 공산정권 치하에서 폐쇄적으로 자문화 우월주의 교육만 받아왔기 때문이다.
북한같이 평생을 이런 식으로 교육받다 보니 자국의 문화를 비판하거나 얕보는 소리를 하면 병적으로 반응한다.
지금은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하고 원만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선 베트남이 중국 견제를 위해 필요하고, 베트남 역시 중국에 먹히지 않으려면 미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 입장에선 서로 경제 성장에 집중하는 측면이 크다.
필요에 의해 옛일은 덮고, 나라의 실익을 위해 손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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