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알렉산드리아 해변
남희와 나는 에라스무스 다리 부근의 한 조용한 카페에 마주 앉아 말리부와 스페인 해물 요리 빠에야를 시켰다.
늘 흔들리는 배에서 내리니 이젠 땅이 흔들리는 것 같단다.
남희는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달라고 재촉했다.
달콤한 말리브 온더락스로 목을 축이고 긴 이야기지만, 남희 성격을 고려해 많이 줄여서 말하기로 생각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파티아와 꿈같은 사랑
지중해의 유명한 이집트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리점에 업무차 방문하기 위해 배를 나섰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옛것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로 보였으나, 부두에 내려 대리점 차로 시내에 들어서니 사막의 모래 먼지와 함께 매연이 심해서 호흡이 불편할 정도였다.
말이 끄는 마차와 함께 티코, 마티즈가 종횡무진 시내를 질주하고 있어 무척 반갑다.
어쩌다 포니도 보인다.
'아니 저 차가 아직도 굴러다니다니, 고장 나면 어떻게 고치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시 후 운전기사가 깨끗한 건물 앞에 차를 세우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란다.
"하이! 하유 두잉?"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하는데 남자 직원은 아무도 없고 냉방이 잘된 사무실에 정말 아리따운 아가씨가 수줍게 웃으며 맞이한다.
"웰컴! 캔 아이 핼퓨, 플리스?"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집트 미녀의 유창한 영어에 갑자기 주눅이 들었다.
클레오파트라가 환생하면 이런 모습일까?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실물로 보기는 처음인 거 같다.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 아가씨 때 모습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앞에서도 진땀이 나기 시작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가 탁 막혀버려 우물쭈물 말이 안 나온다.
아가씨는 이미 나의 방문을 알고 있어서 생글생글 웃으며, '우츄 라이크 해버 커버 커피 오 오렌주스, 플리스?' 하고 묻는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왜 미인에 이리 약하냐?
앉으라는 의자에 엉거주춤 앉으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오렌주스, 플리스.'라고 대답했다.
긴장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을 해 보니 '클레오파트라'의 후예 같은 이 아가씨는 '히파티아'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고, 카이로 대학을 나온 엘리트 여성으로 이집트에서는 여성이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는데 재색을 겸비한 데다 영어가 유창해 외국인을 상대하는 인터내셔널 쉬핑 에이전트에 당당히 공개 채용 시험을 거쳐 발탁된 재원이었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려면 칭찬부터 해야지,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데.
"요 소 뷰러플, 룩스 라이크 클레오파트라!"
나의 칭찬에 우와! 이 아가씨 입을 못 다무네.
'리얼리?' 함박웃음을 웃으며 되묻는 아가씨에게 '슈어! 슈어!'라고 대답하면서 잘 풀릴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리점에 뭔 일 하러 갔는지도 잊고 예쁜 아가씨에 눈이 뒤집혀서 작업한답시고 시내 관광 안내를 해 달라고 부탁하니 '어럽쇼!' 이 또한 쾌히 응한다.
둘이 대리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일단 해변으로 갔다.
분위기 잡으려면 바닷가가 '이찌방데쓰요.'가 아닌가.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름 위에 뜬 기분으로 이집트의 아름다운 아가씨와 해변을 걷는다.
영어로 말을 하다가 잘 안 통하면 손짓, 발짓 그리고 만국 공용어 바디 랭귀지가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알렉산드리아의 해변도 어느덧 노을이 지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처음 가 본 이국의 아름다운 해변 절경에 취하고 '히파티아'의 아름다움과 재기발랄함에 정신을 잃을 지경인데도 어김없이 뱃속에서는 때가 됐으니 'I'm hungry. Help me, please!'라는 신호가 온다.
바닷가에 지천으로 있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예약하셨나요?"
레스토랑 입구에서 아리따운 여종업원이 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하자, 한구석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그러자 '히파티아'가 이분은 동양에서 알렉산드리아에 처음 온, 코리아라는 나라의 왕자님인데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아가씨가 잠시 기다리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웬 왕자?' 하긴 어렸을 때 집에서 엄마한테 왕자 소리를 들으며 자랐었지.
잠시 후, 지배인이 여종업원과 같이 나타나 정중하게 안내한다.
졸지에 내가 동양의 왕자가 됐다.
그러면 왕자답게 의젓하게 행동을 해야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왕자다운 행동인지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일단 권하는 자리에 최대한 폼나게 앉고 주문을 하려고 메뉴판을 보니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와 그 밑에 영어가 적혀 있는데 뭐 아는 게 있어야지.
'히파티아'를 보면서 정중하게 메뉴판을 그녀가 보기 좋게 놓아주고, 까막눈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는데 여종업원이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서 웃음을 참으려고 쿡쿡댄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언제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 봤어야지.
만 날 허름한 분식집이나 학사 주점만 들락날락했었지.
그리고 엄마나 누나 빼고 다른 여자들은 왜 이렇게 불편한 거야.
'히파티아'가 메뉴판에서 뭔가를 가리키는데 사진에 바닷가재가 보인다.
"Oh, Lobster! That's a good. It's delicious! Give me, big one, please!"
(오, 바닷가재! 거 좋지. 맛있잖아. 이왕이면 큰 놈으로 주셔!)
말만 들었지 언제 바닷가재를 보기나 했나.
어렸을 때 우이동 계곡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민물 가재를 본 게 전부였지.
아무튼 내숭은...
난생처음 보고 맛보는 오드되브르(전채 요리)에 'Help me, please!'라고 '꼬르륵' 소리를 내던 일심 이체의 위장은 달래 놓고, 잠시 후 골동품 같이 고풍스럽고 엄청 큰 그릇에 바닷가재가 한 마리 턱 하니 엎어져서 탁자 위에 놓인다.
내 평생 앞으로 언제 클레오파트라같이 멋진 아가씨와 이국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기겠는가 하는 생각에 돈이야 어쨌든 독일 라인 산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시켰다.
그녀도 환하게 웃는다.
작업의 정석 기본에는 일단 술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독일산 고급 화이트 와인에 랍스터라!
히파티아와 함께 하는 왕자 부럽지 않은 만찬과 알렉산드리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온 세상이 내 것같이 아름답게 보인다.
멋진 디너를 마치고 지중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닷가를 걷는데 '히파티아'가 가볍게 팔짱을 낀다.
아니 이게 얼마 만인가.
출국하기 전 공항에서 남희와 잠깐 팔짱을 껴보고 실로 몇 년 만인가.
내 팔이 모처럼 호강하네.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디스코 클럽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보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떡여 같이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웬만한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술은커녕 클럽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데 이집트는 맥주의 기원인 나라답게 많이 개방되었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제법 많은 젊은 남녀들이 플로어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고, 더러는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다.
간간이 발리 댄서들이 손님 테이블에 맨발로 올라와서 배꼽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댄서들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며 배만 노출하고 있다.
웨이터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서 흥겨운 음악을 들으며 '히파티아'와 맥주잔을 기울이자 옆자리의 젊은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앉은 자리에서 잔을 높이 올려 건배하는 등 동양에서 온 왕자에게 관심을 보인다.
급기야 한 청년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묻기에 'I'm from Korea'라고 대답했더니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 'Korea!'를 외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음악이 끝나자 플로어에 있던 젊은이들이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오늘 결혼식을 했는지 신랑, 신부로 보이는 사람 주위로 수십 명이 둘러앉고 다른 손님은 별로 없다.
잠시 후 사회자가 신랑, 신부를 호명하여 요란한 함성과 박수 속에 축하 세레머니를 한다.
그때 갑자기 옆자리의 청년 한 명이 무대 위로 뛰어가더니 사회자에게 뭐라고 말하니까 사회자가 우리 쪽을 쳐다보며 '오리엔트 어쩌고, 사우쓰 코리아 저쩌고' 하며 우리 자리를 가리킨다.
갑자기 조명이 우리에게 비치며 함성과 손뼉 소리가 클럽이 떠나갈 듯이 요란했다.
'아니, 나보고 뭐 어쩌라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클럽 안에 있는 모든 젊은이가 일어서서 환호와 손뼉을 치며 나를 쳐다보고 무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얼떨결에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엉거주춤 무대로 나갔고 사회자가 목청껏 뭐라 말하며 마이크를 넘겨준다.
눈치나 분위기로 봐서 ‘아! 이집션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마이크를 넘겨받고 축하는 해주어야겠는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언제 말을 해 본 적이 있어야지, 더군다나 이역만리 외국인들 앞에서 말이야.
눈앞이 캄캄해지며 마이크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저 앞에 '히파티아'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무대에 섰는데 메이드 인 코리아가 쪽 팔리게 그냥 꼬리 내릴 순 없지.
떨리는 목소리로 '쇼크란(감사합니다)'이라고 아랍어로 인사부터 닦고 'Ladies and Gentlemen! I'm from Korea in Orient. Congratulations for wedding...' 하는데 요란한 음악과 젊은이들의 환호와 손뼉 소리에 내 말은 묻혀 들리지 않는다.
신랑신부가 다시 한번 일어나 인사하고, 잠시 후 조금 조용해지자 조명과 함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린다.
축하 인사는 된 것 같고 참, 이제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Let me introduce my girl friend. She's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 She looks like Cleopatra. Her name is Hypatia! I love Hypatia!" (제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이름은 히파티아! 그녀를 사랑합니다!)
격앙된 마이크 소리에 감동했는지 클럽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잠시 숨을 죽였다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지른다.
"Korea! Korea! Korea! Hypatia! Hypatia! Hypatia!"
그 순간 클럽이 떠나갈 듯한 환호와 음악 소리를 뚫고 아름다운 '히파티아'가 양팔을 올리고 진격의 여신 잔 다르크처럼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무대를 향하여 뛰어왔다.
환희에 찬 그녀의 모습이 둥그런 조명과 함께 나를 뿅 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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