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은퇴 선원의 생애 최고의 일장춘몽

부에노(조운엽) 2019. 8. 9. 04:43




기자 피라미드 가는 길



히파티아와 생애 최고의 사랑

 


"Sparky! Sparky!"

그리스 Port Captain(선주 대행)이 내 침실 문을 노크하며 부른다.

서양인들은 통신사를 종종 전기 불꽃이 튀는 것에 비유해 '스파키'라 칭한다.

 

"음냐, 음냐... 가만있자, 여기가 어디지? 흠... 히파티아가 무대 쪽으로 뛰어오고... 그다음엔..."

아직도 히파티아의 향기로운 체취가 느껴진다.

 

"Sparky!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자냐? "

포트 캡틴 영감의 성화에 잠이 깬 나는 머리맡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켜고 탁상시계를 쳐다보았다.

8시가 다 되어간다.

선박에서는 보통 아침 6시부터 식사를 하고 8시에는 오전 일과가 시작된다. 

얼른 커텐을 열면서 대답했다.

"Oh! Captain. Come right in, please." 

그제야 영감이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왔다.


"대리점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그리고 혼자 그렇게 밤늦게 돌아다니면 어떻게 해?"

영감이 어제저녁에 기다리면서 걱정을 했던지 들어서자마자 따발총같이 퍼부어댄다.

포트 캡틴은 우리나라 선원들과 혼승을 많이 해 봐서 한국 선원들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고, 직책이 직책인지라 선, 기장의 시어머니 역할을 하다 보니 배에서 외톨이로 지내기 일쑤이다.

통신장과는 업무상 부딪칠 일이 별로 없고 SSB 무선 전화로 자기 집에 전화만 잘 걸어주면 만사 O.K.다.

 

어이쿠! 어제 대리점에서 아무 일도 못 했잖아.

머뭇머뭇하면서 대답하길 '매니저를 못 만났어요. 오늘 다시 가 봐야죠.'

아가씨하고 데이트하느라 업무 처리를 못 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얼른 식사하고 에이전트에 갔다오게."

선주 감독이 말하고 나가자, 히파티아와 오늘 피라미드 관광을 가기로 약속한 게 생각이 났다.

그녀를 만날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설렌다. 

서둘러야겠다.

 

모처럼 때 빼고, 구두 사고 처음으로 광내고, 선글라스도 쓰고 서둘러서 나가는 나를 보고, 갑판 위에서 일하고 있던 선원들이 '어이! 털털이 국장님. 좋은 일 있나 봐요. 모처럼 멋있게 차려입고 어딜 가요? 우리도 같이 갑시다.'라고 말하며 휘파람을 불어대는 선원도 있다.  

대리점에 간다며 손을 흔들어주고 걸어서 부두 게이트를 나와 거리를 쳐다보니, 아니 이럴 수가... 

빨간색의 앙증맞은 오픈 스포츠카가 한 대 세워져 있고, 운전석에 히파티아가 얼굴이 뚫린 차도르를 쓰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채 빙긋이 웃으며 하얀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시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해서 선글라스를 추켜올려서 다시 쳐다보았다. 


예쁘게 웃으며 'Come on, please. Hurry up!'이라고 깜찍하게 이야기한다.

얼른 옆에 타니 터번을 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자 피라미드까지 두어 시간 걸리는데 남의 이목도 있으니 쓰란다.

졸지에 한국의 왕자에서 아랍 왕자로 변했다.

호기심에 우리를 쳐다보는 부두 앞의 이집션들을 뒤로 하고 시동을 걸어 하이웨이로 향했다.

군데군데 야자수가 서 있고 사막 한가운데 뻥 뚫린 하이웨이를 히파티아는 기어를 6단까지 올리고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는다.

나는 약간 겁이 나서 히파티아를 쳐다보니 까르르 웃으며 'Don't worry about it. Take it easy!'라며 손을 잡아준다.

'아니,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에이,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더군다나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라면'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훼드라~!' 라는 고함이 튀어나왔다.

히파티아도 기분이 좋은지 까르르 웃어댄다.

잠시 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그녀도 스치는 듯한 입술의 감미로움을 음미하듯 살포시 눈을 감았다 뜬다. 

 

시간이 얼마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멀리 피라미드가 보인다.

여행도 누구랑 같이 가느냐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난다.

냄새나는 사내들과 아무리 멋진 데를 가 봐도 무덤덤하니 그저 그런데, 히파티아와의 여행은 왜 이리 가슴이 뛰고 시간도 덧없이 금방 흐르는지...

남자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4,500여 년 전, 사막 한복판에 무엇으로 저렇게 큰 돌을 옮겨다가 집권자의 무덤을 만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민초가 고생하고 죽어갔을까?'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히파티아가 내 손을 잡고 피라미드 안으로 안내한다.

아르바이트로 가이드를 좀 해 보았다며 친절히 이것저것 설명한다.

물론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녀의 예쁜 입과 가지런한 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서늘한 피라미드 안의 천장과 벽을 쳐다보니 바위 사이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정말 대단하다.

수천 년 전에 이렇게 만들었으니 불가사의한 것 중 하나겠지.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손을 잡고 피라미드를 내려와 수호신 스핑크스 옆에 있는 낙타를 원 달러에 타 보았다.

낙타 타기는 말을 타기보다 쉽다.

낙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낙타 주인이 이끄는 대로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주인이 낙타를 일으켜 세우고 정해진 코스를 한 바퀴 돌면 된다.

 

아쉬움이 남지 않게 볼 건 다 보고 히파티아의 스포츠카에 올랐다.

사실 이 차는 그녀 차가 아니고 동양의 왕자를 모시려고 오빠한테 빌렸단다.

덕분에 히파티아와 함께한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이 됐다.

 

오는 길에 해변의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으로 샥스핀에 프라이드 라이스를 먹었다.

물론 쌀은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안남미 종류였다.

먹고 나면 금방 소화되는 찰기가 없는 쌀이다.

콜라를 시키니 펩시콜라를 갖다준다.

코카콜라는 없냐고 물으니 히파티아가 아랍 국가에서는 코카콜라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미국의 코카콜라가 맥을 못 추는 나라이다.

공식적으로 코카콜라가 없는 나라가 쿠바와 북한이라던가.

 

기자 가는 길은 서둘러 갔지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는 길은 급한 것이 없어서 천천히 운전하며 히파티아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중동 아랍 국가에 별 애착이 없단다.

어렸을 때는 멋모르고 컸는데 교육을 받으면서 이슬람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현 종교와 체제의 모순 때문에 너무 힘들어 기회만 주어진다면 여성이 자유스러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며 애잔한 눈으로 쳐다본다.

 

붉은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알렉산드리아의 해변에 차를 세우고 야자나무 아래에서 가볍게 포옹하고 긴 입맞춤을 했다.

"Do you want to gonna Korea with me, Hypatia?"

입술을 떼며 내가 묻자, 그녀는 슬퍼 보이는 눈동자로 내 눈을 그윽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Port of Alexandria


 

"국장! 국장! 방송 듣는 즉시 선장 집무실로 오세요!"

다음 날 아침에 히파티아를 만나려고 상륙 준비를 하는데 선내 방송이 나온다.

선장 집무실로 가니 그리스 포트 캡틴과 대리점 매니저가 선장과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나타나자 세 명의 인상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이, 국장! 자네 대리점에 업무차 간다더니 이틀 동안 도대체 뭘 한 거요? 매니저는 당신 코빼기도 못 봤다는데..."

캡틴이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얼른 대답할 말을 못 찾아서 우물쭈물하자 포트 캡틴이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Sparky! Why don't you go to agent for two days? Do you know for 'Honor Killing'?" (국장! 이틀 동안 왜 대리점에 안 들렀는데? '명예 살인'에 대해 알아요?)

엥? 대리점에 가기야 갔지, 첫날에...

근데 누가 죽어? 날 죽인다는 말이야, 뭐야?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좌중의 눈치를 보는데 캡틴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슬람 국가에서 한 해에 수백 명이 명예 살인으로 살해되고 있다는데 대책 없이 대리점 아가씨와 백주에 손잡고 다녀? 국장! 당신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이어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대리점 매니저가 심각하게 말을 한다.

"Radio Officer, Listen! If Hypatia is killed by her family, you like it? Here is Islamic country. Very dangerous. Big problem!" (통신장, 잘 들으시오! 만일 히파티아가 가족에게 살해되면 좋겠소? 여기는 이슬람 국가요. 매우 위험해요. 문제가 크다고!)


흐윽! 어떡하나? 히파티아가 외국인과 사귀다 명예살인 될 수도 있다는 말이네.

무시무시한 나라로군. 

말로만 듣던 명예 살인이 그녀에게 일어난다면...

걍 둘이 튈까.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선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국장! 여러 말 할 것 없이 내일까지 시말서 써오고, 선장 직권으로 알렉산드리아 출항할 때까지 상륙 금지요! 할 말 있소?"

 

힘없이 서 있는 나를 보고 평상시 친하게 지내던 포트 캡틴이 이제 됐다는 듯 손짓으로 가보라 한다.

그 순간 나는 비에 젖은 짚더미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간신히 통신실에 도착해서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범벅이 되어 아이처럼 흐느꼈다.

히파티아에 대한 그리움은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다.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주먹으로 벽을 치며 울부짖었다. 

 

지금도 어쩌다 이슬람 뉴스를 접하면 히파티아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온다.

더욱이 술 한잔이라도 걸치면 그때 다친 주먹도 아리는 것 같다.

세계 최고 미인 히파티아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목이 메고 바다 안개같이 뿌연 것이 눈 앞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