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항해일지 중 배끼리 사랑하면

부에노(조운엽) 2019. 8. 16. 07:57


 

배끼리 사랑하면...

 

 

‘HAPPY NINA’ 호의 매선 

 

 

노르웨이에서 이번 항차 하역을 모두 마치고 ‘HAPPY NINA’ 호는 빈 배로 공해상으로 나온다.

선주로부터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경제 속력으로 그리스 쪽으로 가란다.

부서별로 인벤토리를 작성하고...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이런 경우 배가 팔리는 것이다.

새로운 선주에게 배를 인도해주기 전에 배가 팔렸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부 선원들이 동요하여 일을 안 하고 선내 비품을 버리는 등 정상적인 운항에 지장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 아니면 대부분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기관장님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부서장 회의에서 캡틴이 말문을 연다.

“허허, 나야 배 팔리면 할망구 엉덩이나 두드리고 손주 녀석들 재롱 보다가 회사에서 배 나가라면 다시 나와야지요.”

“초사는?”

“네, 저도 매선 수당 받아서 그거 다 쓰기 전에 자리 알아봐야죠.”

“그래, 1기사는?”

“저도 초사나 마찬가지입니다. 별 뾰족한 수도 없고요.”

“국장만 남았네?”

“네, 총각이 귀국해야 별일 있습니까? 저는 한국 맨닝 회사 거치지 않고 독일 오너 배에 다이렉트로 취업하려고요. 독일 다니는 배를 구해 타야죠.”

“흠, 한국 면허장 말고 어디 면장이 있소?”

캡틴의 질문에 대답한다.

“파나마와 라이베리아 1급 통신장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그래요. 독일 국적선 말고 그 두 나라 선적이면 탈 수 있겠구먼.”

 

북해의 차가운 해풍을 온몸으로 받으며 통신실 옆 데크에 나와 있다.

남희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 심장의 박동을 느꼈던 바로 그 장소에.

그녀의 심장이 뱃고동 소리같이 내 심장안에서 힘차게 울리는 것 같다.

습기가 많은 찬 바닷바람이 마치 남희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지럽히는 것 같다.


물안개가 스쳐 가며 시야가 흐려진다.

뱃고동이 길게 울려 퍼진다.

안개 항해 중에는 자주 뱃고동을 울려준다.

나 여기 있으매 지나는 선박끼리 서로 사랑하지 말자고.

배끼리 사랑하면 상처투성이의 치욕만 남겠지.

 

곧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도 0도를 지나게 된다.

배를 처음 탔을 때 초짜 선원을 놀려먹는다고 적도와 본초자오선, 날짜 변경선 등에는 해상 브이가 설치되어 있으니 잘 찾아 보라고 고참 선원들이 짜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적도를 지날 때 적도제를 지내고 난 후에 해상 브이 인증샷을 찍을 거라고 몇 시간을 바다만 뚫어지게 쳐다본 기억이 난다.

 

대항해 시대를 지나면서 지도에 기준선을 긋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유럽의 각 나라는 각기 자기네 국가를 지나는 기준자오선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 교류가 많아지니 많은 자오선 중에 하나로 통일된 것이 필요했고, 1884년 워싱턴에서 국제 자오선 회의가 열렸다.

이때 영국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를 지나는 선을 본초자오선으로 결정하였다.

한편, 이때는 시간의 기준도 나라마다 다 달랐는데 지구의 기준선인 본초자오선이 결정되니 시간의 기준도 영국의 그리니치로 채택되어 동서 경도 180° 지점에는 날짜변경선이 설정되었다.

그래서 시간으로 지구에서 하루가 가장 먼저 시작하는 곳이 뉴질랜드를 비롯한 태평양의 조그마한 섬들이다.

또한, 1925년 초에 하루의 시작을 정오에서 지금과 같이 자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결정된 본초자오선은 당시에는 주로 항해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선박이 대양항해할 때 SEXTANT(육분의)를 사용하여 태양, 별, 달, 육지의 고도를 측정하여 현재 위치를 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폭격기는 영국에 공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줬다.

특히 야간 공습에 섹스턴트를 사용하여 타격 목표에 상당히 정확하게 폭격해 영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흑역사가 있다.

독일 함부르크 무선국에서 트래픽 리스트를 알리는 시간이다.

본선 콜사인을 호출한다.

8메가 헤르츠 워킹 주파수로 변파하여 전보를 수신한다.

 

‘HAPPY NINA’ 호가 팔렸으니 그리스의 피리우스 외항에서 새 선주에게 인도해주고 계약 기간이 남거나 연장을 원하는 선원들은 알렉산드리아 독에서 수리 중인 독일 선주 파나마 국적인 Car & Bulk Carrier ‘HAPPY LATIN’ 호에 전선 해준다는 전보이다.

귀국을 원하는 선원들과 파나마 면허나 선원수첩이 없는 선원들은 전원 2개월 급료에 해당하는 매선 수당을 지급한단다. 

전보를 타이핑해서 캡틴에게 갖다주니까 최소 당직자를 제외한 전 선원을 부원 식당 휴게실로 집합하라고 했다.

나는 선내 방송을 하고 팩시밀리 기상이 나오는 시간이라 통신실에 대기했다.

 

기상도를 브리지에 갖다주고 INMARSAT 전화기를 든다.

몇 번의 통화를 시도하였으나 바쁜 그녀의 일상 때문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긴 벨 소리 끝에 수화기 건너편으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린다.

 

"할로? 구텐 타크!”

남희의 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위성 전화를 통해 들린다.

“나, 나야!”

“어~ 그래. 자기 어디야?”

“응... 북해. 노르웨이에서 나왔어.”

“자기, 전화 여러 번 했지? 안 봐도 알아. 여기저기 슈팅 다니느라 바빴거든, 잘 있는 거지?”

“응, 배 팔린대.”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응, 더 잘 됐는지도 몰라. 독일에서 남미 다니는 자동차, 벌크 겸용선으로 전선 하게 될 거야.”

“그래~, 그럼 계속 보겠네. 와, 신난다.”

“잘 있는 거지?”

“그러엄~, 난 매일매일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한데.”

금방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어 미치겠더니만, 나미 목소리라도 들으니 살 것 같다.”

“그래, 열심히 살아... 우리 사랑 더 해야지... Carpe 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