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의 바다와 배
억제할 수 없는 슬픔
그렇게 남희는 함부르크항에서 떠나갔다.
한 순진한 바다 사나이의 가슴을 울리고, 예쁜 덧니를 보이며 상큼한 바다 향기 같은 웃음을 남기고, 내가 선물한 목걸이를 걸치고 하얀 손을 흔들며 긴 머리를 휘날리고 그렇게 ‘HAPPY NINA’ 호를 떠났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말.
“내 가슴 한쪽은 늘 네게 가 있을 거야.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너는 너의 자리에서... 나는 나의 자리에서... 언젠가 다시 닿게 되는 날까지, 이렇게 서로를 가슴으로 안고 사는 거야.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어.”
남희를 만나러 그 먼 뱃길을 헤쳐올 때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지개 같이 설렜던 허공에 뜬 느낌.
흔들리는 배 위에서 구름 위에 뜬 것같이 걸음걸이조차 두둥실 떠다녔지.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녀의 숨결을 느낄 때는 숨쉬기조차 곤란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게 할 때, 그녀의 뛰는 가슴의 고동을 등으로 느낄 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한 행복감.
이젠 다가갈 수도, 향기조차 느낄 수 없다니.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됐는데...
나는 남희가 보고 싶어.
그냥 같이 있고 싶다고!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아.
비록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터덕터덕 남희가 떠난 자리로 간다.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를 손으로 쓸어 보고, 화장했을 거울 앞에 서 보고, 샤워했을 욕실 하며...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그녀가 신던 구멍 난 스타킹이 삐쭉 나와 있다.
누가 볼 새라 얼른 집어 가슴에 안아 본다.
그동안 참았다가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나오는 흐느낌.
행여 누가 들을까 이를 앙다물며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어 가슴을 쳤다가 벽을 치고 고개를 흔들며 온몸으로 오열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안의 힘이, 기가 다 빠져나간 듯 한쪽 구석에 남희가 버리고 간 스타킹처럼 축 처져있었다.
일심이체의 위장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까이거 한 끼 안 먹는다고...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
항상 이별은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픈가 보다.
어딘가에 반드시 흔적이 남겨져서...
우리는 순진해서 얼떨결에 사랑한 그런 파피 러브가 아니라 겪을 만큼 겪고 뒷걸음 칠 만큼 치고도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 없는 당김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처음이어서 그녀의 심장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내 마음과 나를 향한 남희의 가슴이 세월과 거리를 넘어 닿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주 헤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왜 이리 슬플까?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쉬어서일까.
남희는 기약이 있는 헤어짐은 하나도 슬프지 않다던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건 아니건, 믿음이란 것은 사람을 기다릴 수 있게 하고 살게 하니까.
그래서 그녀는 머리 쥐어뜯고 후회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기쁜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나에게 필요한지, 얼마나 감사한지, 하고 싶은 말 절대로 아끼지 않고 다 한다는데...
캡틴의 선내방송이 들린다.
“국장! 어디 있소? 빨리 식사하고 본사와 차타라(용선주)에 전보 보내야지. 얼른 식당으로 내려오소.”
아, 정신 차려야지.
내가 이러할진대 남겨두고 떠나는 남희의 가슴은 얼마나 아플까.
또다시 북받쳐 오르는 설움...
침실로 돌아가 그녀의 스타킹을 베개 밑에 넣고 세수를 한다.
거울에 비친 눈을 쳐다보고 짙은 색의 안경으로 바꿔 끼고 사관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이, 어서 와요, 국장. 다들 식사 끝났네. 얼른 식사하소.”
마주친 눈을 얼른 외면하면서 반갑게 맞이하는 캡틴.
“네...”
1항사가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어, 국장! 형사 같소.”
“아, 네...”
“국장 기분도 그럴 거 같고, 어이 싸롱! 내 방에 가서 내가 마시는 와인 갖다가 좀 데워 오니라.”
캡틴이 말하자 1항사도 거든다.
“싸롱! 올라간 김에 내 방 냉장고에서 잉카 콜라 한 병 갖고 와요. 국장 주게!”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우씨, 아껴 먹는 건데, 이제 몇 병 안 남았잖아.’
나는 남희가 앉았던 자리를 넋 나간 듯이 쳐다보다가 또다시 터져 나오는 슬픔을 삼키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식당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1항사가 ‘어~ 어! 국장...’ 하고 뒷말을 못 잇자 안 선장님이 혀를 차면서 한마디 한다.
“어이, 초사! 거 이왕 주려면 기분 좋게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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