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에노(조운엽) 2019. 7. 17. 08:37

  


  

지브랄타 해협을 항해하는 유조선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All stand by~ All station!"

“브리지, 여기 폭슬! 감도 좋습니까?”

“브리지, 여기 풉! 감도 좋습니까?”

 

한때 해가 지지 않았다던 영국의 리버풀 항에서, 콜롬비아의 까르따헤나 항에서 싣고 온 원유를 다 풀어준 유조선 'NAMMI SPIRIT' 호의 승조원들은 어스름한 여명의 잿빛 항구를 벗어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선교에서 3항사가 출항 준비를 위한 올 스탠바이 방송 소리에 이어 잠시 후 선수와 선미에서 1항사와 2항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선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이어 3항사 대신 직접 마이크를 잡은 억센 경상도 억양의 안 선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잘 들려요. 1항사, 2항사! 선원들 하역 마무리칸다고 밤새 잠 못 자고 바로 출항해서 피곤들 할 테니 천천히 해요. 바쁠 거 없으니.”

 

“폭슬, 로~져~!”

오지랖이 넓어 느려 터지게 보이는 1항사의 대답에 이어 해군 ROTC 중위로 전역하고 승선한 2항사의 군기 든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풉, 라져!”

 

! 우리 캡틴 멋쟁이야.

저 불같은(?) 양반이 오늘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이네.

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안 선장님은 건장한 체구에 견장 네 개의 하얀 제복이 잘 어울린다.

대통령이 배에 와도 선장 자리에는 안 앉는다는데 콜롬비아에서 상륙 나가실 때는 솜브렐로를 쓰고 콘돌이 새겨진 화려한 티를 걸치고 나가시더니, 언제 선미 씨 이름을 다 기억하고 식사 마치고 풉 이야기 한마디하고는 그 말을 알아듣고 모두들 웃기도 전에 사라지시고 말이야.

 

갑자기 선미에서 다급한 2항사의 외침이 선내 스피커를 찢을 것만 같았다.

“윈치 스톱! 스토~옵!!! 선장님 여기 풉! 3타 손이 윈치 로프에 말렸습니다!”

“뭐라카노, 이놈의 자석들! 천천히 하라 캤더니, 윈치 멈추고 3항사 니는 빨리 풉으로 가봐! 국장은 빨리 대리점에 연락하고. 야, 2항사, 임마! 니가 당황하면 안 된데이! 기관장님도 풉으로 올라 가 보소.”

 

배가 부두에서 움직이지 않게 묶어 둔 굵은 로프를, 출항하기 위해 배로 감아 올리던 중 황소 눈의 3타수 손이 장갑과 함께 말려들어간 것이었다.

본선에서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부두에 대기 중이던 앰뷸런스에 신속하게 실려 갔다.

 

위급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지휘하는 거대한 화물선의 최고 책임자인 캡틴의 노련미가 돋보였다.

선주가 일없이 월급을 많이 주는 것이 아니지.

선박에서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

항해중이든 하역중이든 스케줄에 맞춰 시도 때도 없이 움직인다.

 

본사, 용선주와 대리점에 출항 전문을 보내고 통신실 옆의 데크로 나갔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지구소녀 님이 살고 있는 영국 땅.

참 우리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위하여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공부한다고 땀을 흘리고 있구나.

열심히 사는 이들이 있으니 우리에게 더욱 밝은 미래가 있겠지.

 

선미 쪽을 쳐다보자 아까 난리를 쳤던 사고현장에 물을 뿌렸어도 검붉은 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애고, 손가락이 형태도 없이 다 짓이겨졌다던데 그만 하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팔까지 말려들어갔더라면…

선내에서 도끼 춤추고 만기를 채운 선원이 없다더니 결국 그렇게 가는구나.

그렇게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던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물거품이 긴 타원형을 그리는 것을 보니 지중해를 향해 선수를 돌리는 가 보다.

남희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기 친구 선미 씨를 소개시켜줬다가 가지도 않은 시집을 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버리려고 하니 남 주긴 아깝다는 말인가.

맥주 한잔 하고 그녀의 씩씩하고 밝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 밖에 없었는데.

남희 그 여시가 내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남희의 편지를 받아보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그런 깊은 갈등이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머슴애들만 있던 과를 호령하던 대빵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알고 싶어서 번민해왔던 혜린이 누나와 Nina의 삶을 그녀는 이미 십대에 고민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말이잖아.

그러니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을까.

역시 나는 정신연령이 어려.

 

전에 키일 운하를 통과할 때 맞은편에서 오는 배를 먼저 보내기 위해 잠시 계류 중에, 갈대 숲 우거진 곳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카페가 보여 배를 내려 잠시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북해의 칼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시나몬이 든 레드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나는 Nina의 숨결을 따라 여기까지 왔고 혜린이 누나와 달리, 살며 사랑하며 즐기기 위해 이 와인을 마시노라.’라는 엽서를 남희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길 가던 예쁜 독일 아가씨가 뭔가를 묻기에 ‘No speak Deutsch. Can you speak English?'라고 되물으니 그녀는 고개를 살랑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예쁜 엉덩이를 흔들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나저나 편지에 쓴 대로 남희가 가고 싶었던 신방과를 안 가고 통신과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특파원으로 나가게 됐고 방송하다가 장비가 고장 나면 자기가 고쳐서 쓰면 되니까.

그러면 방송국에서 얼마나 예뻐할까.

 

리버풀에서 보낸 내 편지 받아나 보고 출국할까?

독일에서 만나게 되면 시나몬과 스위트 바질이 든 따뜻한 레드 와인을 같이 마셔야지.

그리고 남희가 보낸 편지 하나도 안 버렸다고 보여줘야지.

구겨지고 아귀 뱃속에서 바래진 편지는 안 보이게 속에 넣고.

뽀뽀해주면 이미 소화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까르따헤나의 그 아귀한테 어떻게 고맙다고 전해주지?

 




 

  


 

 

 

 

David 그렇쵸. 홍수가 일어나면 제일 얻기 어려운 게 먹을 생수라고들 하지요. 미디어의 홍수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어렵죠. 님의 말처럼 그림 한 장, 짧은 글, 음악 하나에 쉼을 얻죠. 쟈스민 님 반갑습니다. 근데 저 브라질에 살지 않지만 와인 한잔 주실 수 있나요? ^^   04-21

Khunying 자스민님 말처럼 라틴 방에 들어오면 기분이 편안해집니다. 각국 나라방 중에서 제일 멋장이들이 많은 방 같습니다.   04-21

쌈바소녀 맞아요 ~ 부에노님 멋쟁이!!   04-21

워렌버팡 휴 ~~ ^^   04-21

알젠의 봄 글도 읽기 전에 지난 번 댓글에 I'm sailing~을 올린 기억과 부에노님의 섬세한 화답에 놀랐습니다. 어쩌나~ 추천 한 방(?)으로 고마운 표시하겠습니다. ^^   04-22

David 어! 자스민님 향기만 남기고 유유히... *^^ 아가씨들은 수줍은 듯 재잘재잘~. 영감들은 추파를 던지고*^^.. 그런데, 라틴방의 누님들은(?) 아직도 말이 없으시네. *^^.   04-22

부에노 푸하하하!!! ㅋㅋㅋ ^^     04-22

부에노 라틴방 들어온 이래로 오늘 최고로 많이 웃었네요.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하하하... 그냥 가려다가 David 님이 라틴방에서 최고의 추천을 받는 명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확실히 느끼겠구먼유. 아, 넘 즐겁다. 하하하... ^^ ^^ ^^     04-22

세인트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남미인들의 특징 때문이라서 그런지, 라틴방엔 인생을 즐길 줄 아시는 멋진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그 3타수분. 심각한 중상이었군요. - _- 배에서 도끼춤 춘 사람치고 만기 채운 적 없다는 징크스도 신기합니다. ^^   04-23

saci "살며 사랑하며 즐기기 위해...' 이리 말하는 사람이... 뽀뽀해주면...? 뽀뽀를 받겠다는 거네... 그럼...... 그래서 결국... 남희씨를 놓치는 것 아닌가? 나도 Cinnamon과 Sweet basil을 넣은 레드와인 마시고 싶다... 겨울에만 파는데...... 목이 따가운데...   04-23

지구소녀 어머머~ 요즘 바빠서 라틴방을 못 들어왔는데... 제 이름이 거론되다니 너무 영광이에요. ^^:;;   04-25

부에노 ^^ 아자! 화이팅!!! ^^     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