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눈 뜨면 사라지지만 눈 감으면 보이는 그대

부에노(조운엽) 2019. 7. 16. 07:49

 


 

Pub in Europe

 

 

눈 뜨면 사라지지만 눈 감으면 보이는 그대

 


하얀 눈이 소담스레 내리는 리버풀 항에서 선원들이 당직 교대나 상륙을 나가려고 서둘러 밥을 먹고 나간 후 늦게 온 나와 1항사만 사관식당에 남았다.

 

“어이, 국장님! 오늘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요. 싱글벙글하고.”

나이가 열 살인가 많은 1항사가 역시 방긋방긋 입을 못 다물면서 말을 걸었다.

“아, 저야 만 날 웃고 살죠. 그리고 우리 선원들이야 배 붙이면 봄 날 아닙니까? 1항사님 편지가 여러 통 온 거 같던데 뭐 좋은 소식 있어요?”

“캬! 우리 넷째 딸년이 엄마 닮아서 아주 영리한데 이번에 성적이 많이 올랐다네. 그런 거 보면 아빠 닮은 것도 같고. 하하하.”

“그래요? 그런 말씀 통 안 하시더니 좋으시겠어요.”

“그러게 말이요! 그 애가 성적 이야기는 통 안 하는 앤데 이번에 반에서 13등인가 올라서 26등 했대요. 자식이 참.”

“네~?”

 

“그나저나 우리 총각 국장님은 애인한테 편지 많이 왔소?”

“배 타는 놈이 변변한 애인이 있나요?”

“그래요? 전에 국장이 까르따헤나에서 잡은 아귀 뱃속에서 구겨진 편지 같은 것을 주워 갔다고 하던데, 그건 뭐데요?”

“아, 그거요. 별 거 아니에요.”

“아니, 편지를 바닷물에 집어 던진 모양인데 거 뭐야 같은 과에 선머슴같이 쫓아다니며 괴롭혔다는 그 웃기는 아가씨 편지 아니오?”

“아, 네…”

 

내가 말을 얼버무리고 있자 1항사가 침을 튀겨가며 계속 말을 했다.

“하이고, 오죽했으면 총각이 아가씨 편지를 바닷물에 집어 싸겠소.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쯔쯧. 그나저나 여기선 편지 한 통 안 왔소?”

“한 통 오긴 왔어요.”

“그래? 누구한테?”

“전에 항해 중에 맥주 한잔 걸치고 사는 게 뭔지 심란해서 전화를 한 통화했더니 편지가 왔어요.”

“아, 그래요? 몇 년을 괴롭힌 여자가 하루 아침에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소. 살아 봐요. 사람은 잘 안 변해요.”

1항사는 선장 진급을 해도 벌써 했어야 할 사람인데 자녀들이 많다 보니 선장 자리를 기다리며 몇 달을 노는 것보다 빨리 승선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생각으로 만년 1항사를 하고 있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 친구 독일 특파원으로 간대요.”

내가 말하자, 깜짝 놀라며 1항사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능력 있는 친구구먼. 아가씨가 방송국 엔지니어도 대단한데 특파원으로 나갈 정도면, 국장한테 튕길 만도 하겠네.”

약간 머쓱해서 내색 안 하고 있으니 1항사가 다시 말을 잇는다.

 

“거 긴 머리에 엑스 자 젓가락질하면서 안주 잘 챙겨준다던 참한 아가씨는 편지도 안 온대요?”

“별 일도 없었지만 고무신 거꾸로 신었답니다.”

“애고, 쯔쯧!”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가 물었다.

“안 선장님이 그러시던데 옛날 배에서는 Poop에서 밧줄 잡고 일 봤나요?”

“단어 뜻에 엉덩이란 말도 있잖소. 옛날엔 파도 칠 때 풉에서 일 보다가 고기밥이 된 선원들도 꽤 있었다던데, 파도 칠 때는 밥도 적게 먹었대요. 갑자기 왜?"

“그 아가씨 이름이…

“뭐, 풉? 푸하하하! 선미라고? 하하하. 아이고, 배야! 만 날 뒷간 생각할 뻔 했겠구먼."

기름 하역 상황이 신경 쓰이는지 1항사가 일어나며 말했다.  

“국장. 별 일 없으면 바람이나 쐬고 오소. 당직이 아니면 같이 나가서 맥주라도 한잔할 건데.”

 

옷을 갈아입고 현문을 나오자 갑판에서 화물 당직을 서던 동갑내기 3항사가 인사를 하며 말을 걸었다.

“국장님. 상륙 나가세요? 귀선 하실 때 예쁜 애들 몇 명 데리고 들어오세요. 맥주는 제가 쏠게요.”

“어, 수고 많소. 혼자 나가려니 미안하네. 그런데 예쁜 양년들이 뭐 동양 넘을 쳐다보기나 한다요?

 

회색의 공업도시 리버풀 항의 하얀 눈을 맞으며 부두를 혼자 걸어 나왔다.

한 때 해가 지지 않았다던 대영제국.

그 화려했던 시절과 수많은 영욕도 덧없는 세월 앞에 쇠락해서 많은 공장 굴뚝 연기와 겨울눈이 어우러져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시내로 나오니 현란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닭 벼슬같이 머리를 가운데만 남겨서 빨강, 파랑, 노랑, 보라색 등 형형색색으로 염색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인디언 복장같이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 옷을 입은 건지 벗은 건지 검은 가죽으로 가슴과 엉덩이만 가리고 다니는 아가씨들 하며 귀, 코, 입도 모자라 눈썹과 대구빡에도 피어싱을 한 젊은이들…

아무튼 뭔 생각하며 사는지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생각하며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엄지 척하고 미소 지으며 지나쳤다.

 

허름하면서 조명이 은은한 펍이 보여 눈을 털고 들어가 기네스 스타우트를 주문했다.

유럽은 이렇게 오래된 술집들이 맘에 든단 말이야.

어쩌다 운 좋으면 유명한 사람들 빛바랜 흑백사진이나 사인도 보고.

달짝지근하면서 쌉쌀한 흑맥주가 목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눈을 감고 음미했다.

!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맛에 배를 타지.

내 돈 내고 이런 데 놀러 가라면 쉽게 올 수 있겠어?

 

기네스를 몇 병째 마시다 보니 성에 낀 유리창 밖으로 하얀 거리를 흘러 다니는 유니언잭의 디아블라들과 남희 씨의 웃는 모습들이 흐릿하게 유영하는 것 같았다.

 

눈 뜨면 보이지 않지만, 눈 감으면 항상 떠오르는 그녀…

 

코인 뮤직 박스에서 누군가 넣은 로버타 플락의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분위기에 취해 노래를 듣다 보니 남희 씨 편지가 생각 났다.

젊은 친구가 그렇게 많은 세월을 내색 안 하고 속을 썩여가며 자신과 싸워왔다니…

그녀의 말 못할 수많은 고통들이 고스란히 내 가슴에 전해지는 것 같아 쐬해졌다.


나와 그녀의 전혜린 씨에 대한 애증은 처절한 외로움과 왕따 속에서 그래도 왜 더 치열하게 싸워보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는 것이고, 진자는 말이 없지만 왜 끝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절규하는 것이다.

결국 특출함과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가 죽인 많은 천재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주위의 이목에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홀로 서야만 한다.

 

‘그래,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가서 편지를 써야지. 답장을 기다리는 남희를 위하여…’




 

 



 

David
맞아요. 국장님의 글은 사람 냄새가 풀풀나요. 잘 읽었습니더. 오늘도 모래사장에서 동전을 찾았습니더. ^^*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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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바쁘단 핑계로 소설을 안 읽은지 꽤 됩니다. 그런데 부에노님 글을 읽으면 소설책 읽듯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요. 물론 제 맘대로겠지만, 신기해요. ^^ 이제는 글이 기다려져요. 0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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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휘
잘 보았습니다. 언제나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에요!! 첨으로 글 남겨봅니다. 저도 꿈이 세계일주인데... 이제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ㅡ.ㅡ;; 가까운 아시아나 댕겨와야겠어여~~ 다음 글 기다리며 언제나 행복하세요...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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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i
그래도 난 부에노님들의 세상을 꿈 꾸워보고...... 맥주 한잔 걸치고 건 전화가 그녀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였다면...... 아마 부에노님이 술 기운을 빌어... 맞죠...?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어서 배로 돌아가세요...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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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lArt박우물
덕분에 부에노님 원고들이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이렇게 시리즈도 좋지만 역시 완성되어 단행본으로 나오면 감칠맛 안 나고 즉석에서 단숨에 읽어갈 수 있겠지요. 음악감상도 잘 하고 갑니다.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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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정말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지는 글 또 보게 돼서 반갑습니 다. ^^ 리버풀에는 영국의 펑크족들 집결지인 모양인가 봐요... 그나저나 눈도 내리고, 맥주 한잔 하셔서 그런지 더더욱 사람이 그리우시겠습니다, 부에노님 기운 내세요~!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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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i
알젠의 봄님의 I'm sailing, I'm sailing...... I'm trying, I'm trying...... 이... 그냥 귀에 흘려지지 않고 꽂히네요... 옙... 난 우리 어릴 때 노래... '앞으로~ 앞으로~'가 더 생각납니다...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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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젠의 봄
부에노의 항해일지는 참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끝없는 기다림... 그리고 미지의 것에 대한 도전을 생각케합니다... Sailing이란 노래가 언뜻 귀를 스치네요... I'm sailing, I'm sailing...... I'm trying, I'm trying......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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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i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미소 지며 지나친다"...... 세상에 부에노님만 같은 사람들만 살면 너무 심심할까...? 아마 그럼 많은 영화와 소설이 사라질 겁니다... 비극의 소재가 없어서... 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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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ci
  • 2007.04.20 05:09
  • 참 장면 연결이 자연스럽고 좋네요... 점점 늘으시는 것 같아요... 근데... 동기한테도 "씨"해요...? 난 그냥 이름 부르는데... 근데... 남희씨와는 뽀뽀하셨나요...? 점점 더 앞이 궁금해서......
    • 부에노
    • 2007.04.20 07:55
    여긴 지성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서... 흠! 남희 씨에게 직접 물어보심이... ㅋㅋㅋ ^^ 
     
    한 열 번쯤은 읽었나 싶네요... 항해만 양념이 아니라... 리버풀거리도... 눈에 보이는 듯하고... 낡은 까페도 내가 앉은 듯하고...... 부에노님 글은 절대로 앉아서 쓴 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은 역시 돌아다녀야합니다... 나도 부에노님을 보면서... 엄마가 재촉하는 글을 써볼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도 참 다채로운 소재가 많은데...... 열심히 읽고 보고... 느끼고... 배우는 중입니다... 베테랑 소설가가 아닌... 아마추어 작가라서인지... 더 그러네요... 07.04.20 22:38
    이렇게 젊은이들에게 잃었던 꿈을 되찾게 해주고 동기부여를 해 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OTL 07.04.21 00:23

    시도해보세요. ^^ saci님 . saci님께서 시작하신다면 방을 하나 신설하겠습니다.  07.04.21 07:25
    남희씨와는 지금 어느 거리에 있을까나? 오른쪽 가슴에, 아님 왼쪽 가슴에? 추억이 없는 사람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07.04.22 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