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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최성수 y 길눈이 어두운 이들에게

부에노(조운엽) 2013. 2. 1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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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박사님의 강연

 

 

길눈이 어두운 이들에게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길치다.

남들은 눈 감고도 가는 길을 나는 늘 헤맨다.

지난 이 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산에 오르고 있건만 단 한 번도 길을 잘못 들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길눈 제로다.

친구들조차 수없이 다닌 길을 어떻게 날마다 옆으로 새는지 참 신기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이렇게 헤매면서 나름 터득한 지혜가 있다.

아무리 길을 잘못 들어선다 해도 길동무가 생기고, 때때로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항상 새로운 길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삶의 길 또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 년 전 나는 고전문학을 전공한 박사 실업자였다.

대학교수가 되는 것만이 정통 코스였다.

하지만 나는 길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헤매고 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지만 특히 여성이라는 조건은 치명적이었다.

 

우왕좌왕 헤매다가 나는 타고난 길치답게 자연스럽게 옆길로 샜다.

수유리에 조그만 공부방을 만들어 세미나를 열고 강좌를 열었다.

그러자 많은 길동무들이 생겼다.

그러면서 자꾸 새로운 길이 열렸다.

지식인 공동체 '연구공간 수유 + 너머'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 수유리를 벗어나 대학로로, 다시 원남동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상당히 큰 조직으로 변했다.

길 한 번 잘못 들어섰다가 인생 역전에 성공했으니, 길눈이 어두운 게 꼭 불운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그리고 더 기막힌 행운은 박사 실업자였던 내게 평생 직업이 생긴 것이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의 '고전 평론가'가 바로 그것이다.

한 출판사에서 고전을 리라이팅(rewriting)하는 시리즈를 낼 때, 고전의 드넓은 세계를 현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고전 평론가'라는 직업을 만들어 냈다.

 

살면서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삶이 온통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눈이 어두운 자들이여, 두려움 없이 길을 떠나시라.

길 곳곳에 수많은 길동무와 예기치 않는 행운들이 즐비하게 숨어 있을지니...

 

 

 글 고미숙 님

 

 

 

 

해후,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