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오지혜
그 때 그 관객
대학 2학년 때,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첫선을 보이는 워크숍 공연으로 우리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희곡인 '쥐덫'을 택했다.
될성 싶은 떡잎을 가늠하는 자리였던 그 공연에서 나는 지금 생각해도 등골에 땀이 날 것만 같은 실수를 해 버린다.
폭설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 우연히 한 저택에 모이는데, 갑자기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어디선가 형사가 나타나 등장인물들을 취조하기 시작한다.
'미스 케이스웰'이라는 좌익운동가 역을 맡은 나는, 사건이 일어날 당시 어디서 뭘 했냐는 형사의 질문에 서재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노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연기중이었다.
형사는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하고 나는 의심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핸드백에서 편지를 꺼내 보여 준다.
범죄 현장에 없었다는 유일한 단서가 될 증거물을 보이는 장면이었기에 무대 위의 배우들은 물론이요, 소극장을 꽉 메운 관객들이 모두 내 손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가방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 편지가 없었다.
그때의 그 황당함과 절망감이란!
천만다행으로 그 가방은 여자 동기가 실제로 들고 다니던 가방이어서 그 안엔 친구가 쓰던 수첩이 하나 들어 있었다.
난 임기응변이랍시고 가방에 손을 집어넣은 채 수첩을 한 장 찢었다.
그때였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관객 하나가 '풉!'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 소리는 무대 위 멍청한 햇병아리 배우의 실수를 충분히 비웃고 있었다.
어찌됐건 나는 시대에도 안 맞는 무늬가 그려진, 찢긴 수첩 종이 한 장을 형사 역을 연기 중인 동기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동기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우에게 평생 짝사랑의 대상인 관객으로부터 엄청난 모멸감을 느낀 나의 머릿속은, 동기에게 미안함조차 느낄 수 없는 진공상태일 뿐이었다.
공연은 별 무리 없이 끝났다.
하지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소중한 무대 위의 시간을 망쳐 버린 이후로 나에겐 소품 노이로제가 생겼고, 그 덕에 어느 정도 선배 소리를 듣게 되고 나서도 내 소품만큼은 공연 전에 반드시 스스로 챙기는 당연하고 올바른 습관을 갖게 됐다.
배우에게 가장 큰 스승은 이름 없는 관객이라던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게 해준 그 때 그 관객은, 오늘날 나를 있게 해 준 소중한 사람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글 연극인 오지혜 님
The phantom of the opera(오페라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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