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La casa del sol naciente(The house of the rising sun), Alejandra Guzmán y 월급 88만 원과 억대 연봉은 한 끗 차이라고?

부에노(조운엽) 2017. 5. 14. 11:26

 

 

 

 

"제 20대요? 어려움과 괴로움의 연속이었죠."

 


야구의 신이라 불리던 양준혁도 처음부터 신은 아니었다.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단하려 했으나 '더 배우고 오라.'는 핀잔만 들었다.

영남대를 졸업하고 다시 삼성을 찾았지만 '자리가 없다.'고 해서 상무로 발길을 돌렸다.

"야구만 생각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온 지 그때가 딱 15년째였는데, 이대로 무너지는가 했죠. 단무지 팔고 파출부 나가던 엄마 얼굴이 어른거리더라고요."

양준혁의 20대는 요즘 20대와 많이 닮은 듯했다.

수십 수백 번 원서를 써도 취업하기 어려워 수없이 좌절하는 지금 20대와 말이다.

양준혁은 그로부터 2년 뒤 꿈에 그리던 삼성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서서히 신의 경지에 오르기 시작했다.

"난 야구만 했다.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야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다."

 

양준혁은 단호하게 88만 원 세대와 고연봉자는 한 끗 차이라고 말했다.

한 끗 차이라니?

지금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1%의 가능성을 믿고 죽기 살기로 뛰다 보면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양준혁은 야구 기자들 사이에서 땅볼치고 1루까지 가장 열심히 뛰는 선수로 유명했다.

 

 

 


"제 통산타율이 3할 1푼 6리인데 내야안타가 159개입니다. 아웃 될 것 같아도 1루까지 죽어라고 뛰는 거죠. 열심히 뛰면 상대 내야수도 다급해지기 때문에 에러가 나올 수가 있고, 포수가 송구실책을 하면서 결승타가 되기도 합니다. 그게 없었으면 저도 2할 9푼 타자에 불과했을 겁니다. 마음가짐은 한 끗 차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셈이죠.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죽어라고 뛰어야 합니다."

가능성이 없다고 돌아서는 사람과 1%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 결과가 엄청나다는 말이다.

그는 '결과가 어차피 별거 아닐 거로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면 기회를 만들 수 없어요. 하나마나 한 짓이라 치부하는 것이 가장 나쁜 자세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세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든다는 그의 메시지는 연봉에서 확실히 차이가 난다.

타석 열 번 기회에 아웃 7~8번 당하면서 안타 3개 치는 선수와 평균 두 개 반 치는 타자의 연봉 차이는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수십억 원 차이가 난다.


한 끗 차이, 말이 쉽지 그 한 끗을 만들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를 것 같은데 양준혁 역시 그랬다.

"와신상담이라는 말 있잖아요. 뜻을 이루려고 일부러 불편한 자리에 누워 쓸개를 맛본다는 고사성어 말입니다. 삼성 입단을 거절당하고 상무에 갔을 때 제 심정이 그랬습니다. 그때 결심한 게 몸부터 불리자는 것이었죠. 당시 상당히 마른 편이었는데, 야구선수로서 평생 핸디캡이 될 거로 생각했죠. 그런데 웨이트 트레이닝이란 거,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근육이 바로 붙는 게 아니거든요. 처음에는 찢어지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도 참고 계속해야 근육이 박힙니다. 중단하면 원점이죠. 뭔가 얻으려면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의 얘기를 들으니 소처럼 우직하게 걷다 보면 천 리를 간다는 우보천리의 진리는 야구나 인생이나 매한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양준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천 리를 다 왔다고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친구들일수록 보상심리가 커서 목표를 달성하면 딱 멈춰버립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산이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멈추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이승엽 선수처럼 계속 더 높은 목표를 세워가면서 해야 하는데 말이죠. 저도 사람인데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래도 멈추고 싶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러다간 곧 떨어진다.'고 말이죠."

양준혁은 이천 안타가 최고 목표였는데 그걸 치고 나서 '딱 한 잔'만 먹고 다음날 안타 하나 더 때리고 싶어서 연습했다고 한다.

2002년 첫 우승을 했을 때도 하루 딱 놀고 다시 훈련했다고 한다.

"기뻐하는 건 딱 30분, 1시간이면 됩니다. 더 넘어가면 안 됩니다. 거기서 끝내야 합니다. 환희는 빨리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거죠."

참 야박한 얘기이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야구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신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2002년 팀은 우승했지만 자신은 9년간 지켜오던 3할 타율이 무너졌다.

양준혁은 자신의 인생타법에서 1%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기장면을 비디오와 사진으로 계속 돌려봤죠. 어느 날 답이 나오더군요. 신인시절 한창 잘 나갈 때 타격하고 나서 만세를 하는 듯한 사진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바로 이거다.' 싶었죠. 한쪽 팔을 투수 쪽으로 던지며 체중을 실어 치는 거죠. 왜 검도에서도 끊어친 뒤 재빨리 빠지지 않습니까."

바로 만세 타법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넷, 야구선수치고는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다. 

섣불리 변화했다간 오히려 실패만 재촉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겨우내 이를 악물고 갈고 닦은 만세 타법은 다시 그의 타율을 끌어올렸다. 

'똥폼'이라는 핀잔도 많았지만, 그가 불혹의 나이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됐다.

청년들에게 그의 만세 타법은 어떤 의미일까.

"대학교 강연을 다니며 청년들을 만나보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남과 다르게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는 심리 말입니다. 현재를 지키는 건 실은 본전이 아니고 퇴보인데도 말이죠. 많은 청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색깔이 없는 거에요. 뭔가 색깔이 있어야 수많은 무리에서도 튀는 겁니다. 교수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야구로 치면 잘해야 2할 5푼 타자밖에 안 됩니다."

2할 5푼대 청년이 3할대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자기만의 색깔'이라는 조언이다.

똑같은 스펙으로 똑같이 취업에 목매는 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색깔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양준혁은 '스스로 처방전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의 장점은 왼손 타자에다 장타력이 있다는 것이죠. 이를 바탕으로 나름의 타법을 개발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 나 자신을 연구한 것이죠. 누군가에게 기대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묻고 자신이 해답을 내려야 합니다."

스스로 환자가 되고, 의사도 될 수 있어야 자기만의 색깔도 처방해낼 수 있다는, 바로 자기 객관화 훈련을 그는 역설했다.

 

 

 

 


그래도 이승엽 선수에 가려서 만연 이인자로 지내야 했던 게 기분 좋지는 않았을 터. '질투심 같은 건 없었느냐?'고 묻자 '밥상도 네 다리가 있어야 섭니다. 야구가 왜 좋은 운동인지 아십니까. 팀워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번트치고 희생도 해야 합니다. 팀플레이가 안되면 아무리 개인 능력이 뛰어나도 소용없습니다. 야구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요즘 청년들이 자기밖에 너무 모른다.'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청년들의 공동체 의식 결핍을 자신과 이승엽과의 관계에 빗대어 지적했다.

"이승엽 선수가 크기 전엔 제가 최고연봉인 1억 5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승엽이가 아시아 기록을 깨면서 3억 원을 받았죠. 그러니깐 저도 2억 5천만 원으로 오르더군요. 승엽이가 더 받을수록 저도 더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게 팀플레이입니다."

그에게 '최다' 자가 붙은 기록만 최다 경기, 홈런, 안타, 타점, 득점, 타수, 루타, 사사구 등 8개이다.

그는 이런 최고 프로필 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언급되는 최다 사사구가 가장 자랑스럽다고 했다.

볼넷으로 나가고, 또 투수가 던진 볼에 맞아서 나간 횟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뒤의 타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야구를 했습니다. 특히 승엽이에게 말이죠. 그래서 만연 이인자라는 소리를 들어왔는지 모르죠. 그런데 막상 은퇴경기를 하고 나서보니 제가 한국 야구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돼 있더라고요."

 

 

 


야구재단 이사장에, 경기 해설자, 방송출연, 프랜차이즈 음식점 창업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대학교 강연을 나가고 있는 양준혁이 청년들에 마지막 한마디를 했다.

"제가 은퇴하고 방송출연을 하니깐, '강호동 따라 하는 거냐?'는 핀잔도 많았죠. 뭐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야구 경기를 할 때 그랬던 것처럼 늘 새롭게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래야 더 길게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스펙입니다. 그런데 꼭 취업만이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깊이 파고 들어가서 새로운 아이디어 내고 새롭게 창업하는 것도 길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1%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한번 시도하세요."

양준혁은 확실히 신의 경지였다.

잘 나가고 잘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하며 그 한 끗의 차이를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왜 88만 원 세대와 억대 연봉자가 불과 한 끗 차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는지 이해가 갔다.

 


 

 

  


     

La casa del sol naciente, Alejandra Guzmán

       

      Aqui nació, aqui soñó
      aqui vivió mi amor
      pero ya no estas
      no sigues junto a mi
      no esta mi amor
      no esta
      Hogar del sol naciente
      sol que ya no esta
      un sol que ya no alumbrará
      no, no alumbrará
      Si nunca voy a verte
      si jamás tu volverás
      yo me ire muy lejos
      de este hogar
      donde al fin
      yo te pueda olvidar
      Si nunca voy a verte
      jamás te voy a olvidar
      
      

        이 곳에 태어나 꿈을 꾸었어요
        내 사랑과 이 곳에 살았어요
        하지만 살 수 없습니다
        내 말뿐인지 모르겠어요
        사랑은 하지 않겠어요
        아니야

        떠오르는 태양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고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지
        아니, 아니 빛이 나야

        만약 이렇게 집에 가서
        당신이 돌아올 때 아주
        멀리 간 당신을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할 때 어디로
        마지막으로 떠난 당신을
        난 당신을 잊을 수 없어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하더라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