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칠 게 있는 줄 알았는데 따로 길이 없다는 걸 깨쳤다
매스컴의 조명을 쭉 받아온 '출판계 여왕' 박은주 김영사 대표는 말단 직원으로 한참 일할 나이인 32세에 김영사의 대표가 됐고, 아마 국내 출판사 중 단행본 베스트셀러를 가장 많이 냈으며, 직원 1인당 매출액이 한때 국내 기업 중 최고였고, 얼마 전 단행본 출판사 대표 모임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으로 선출됐고, 여대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명사였고, 그녀 자신은 결혼을 안 했고….
―일 때문에 결혼을 못 했다고 말하겠나?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결혼할 사람을 못 만나봤다."
―사귀는 남자는 있었지만?
"사귀는 남자도, 내게 결혼하자는 남자도 없었다. 금생에는 아니라고 봤다."
―소문으로는 동거하는 애인은 있다는데.
"살다보니 별 소문이 다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본 뒤로 '자아 완성'이 내 인생 목표였다. 1984년부터는 아침저녁으로 108배를 하고 '금강경'을 읽었다. 마음공부에 집중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어쩌면 출가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혼과 가정이 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마음을 닦는 것이 더 귀했다. "
―그렇게 오래 수행했다면 벌써 인생의 답이 나왔어야 하지 않나?
"마음공부에 끝이 없을까 봐 불안했다. 영영 못 깨치고 이 세상을 떠날 줄 알았는데, 끝이 있구나, 이런 순간이 오는구나…."
―결국 깨달았다는 건가?
"깨칠 게 없다는 걸, 길이 있는 줄 알았는데 따로 길이 없다는 걸 깨쳤다."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수행하고서 겨우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인가?
"금강경을 2만 번 넘게 읽고서 그걸 알았다. 우리는 완전한 세상에 대해 꿈을 꾼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 자체가 부족함이 없는 세상이다. 지금 일어나는 순간 순간에 있어야 될 것이 있고 이뤄져야 할 것이 이뤄져 있다. 더 완전한 세상이나 더 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당신이 깨달았다고 전제하고, 그전의 삶과 그 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세상에 궁금한 게 없어지고, 불만이 없어지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못 깨쳤다는 생각이 없어진 것이 달라졌다고 할까."
―당신의 삶에 김영사의 전 사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내 삶의 유일한 멘토다. 그분이 젊은 날 존재와 죽음의 문제에 빠져있던 내게 공부하는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 서른두 살 된 여직원을 사장 시켰고.
"그분은 '나는 비즈니스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회사를 물려주겠다.'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그게 현실로 올 줄은 몰랐다. 어느 날 신년 회의에서 나를 지목하며 '이 사람이 지금부터 사장이다. 내게 했듯이 잘 모셔라.'고 했다. 그전에 아무런 암시도 없었다. 종일 말 한마디 없고, 무심한 분이다. 다음 날 그분은 회사를 떠났다. 지금은 지방에서 마음공부를 하며 지내고 있다."
―그런 은둔적 삶을 좇아가지 않는가?
"가야 될 길이 다르다. 내게는 출판 일을 통해 세상을 더 좋고 이익 되게 만드는 길이 있다."
―당신이 김영사 사장이 된 뒤 첫 작품이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였다. 180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출판계에 박은주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다른 대기업 오너의 책들도 있었지만 왜 우리 책만 베스트셀러가 됐느냐. 나는 김우중 회장 측에 '본인의 과오와 실패까지 솔직하게 젊은이들에게 들려주자.'는 기획안을 보냈다. 그 인물을 홍보하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다. 인물을 너무 포장하면 오히려 감동이 줄어든다. 대단한 사람도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고 실패하는구나, 나와 다르지 않구나 하고 알 때 독자들은 마음을 연다."
―책의 인연으로 김우중 회장을 만나 보니 어땠나?
"소탈하고 격식이 없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몇 년 뒤 '세계경영'을 내자고 제안이 왔다. 그때는 '그런 책은 경영 전문 출판사에서 내는 게 좋겠다.'며 거절했다."
―비즈니스에서는 냉정하구나.
"당시 김영사는 작은 출판사였다. 모든 걸 다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분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에 관심이 있었지, '세계경영' 슬로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우는 IMF를 맞아 도산했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던 그 신화적인 존재가 국가 경제에 부담을 준 부실 경영인의 상징처럼 됐다.
"김 회장에 대해 그렇게 평가를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오히려 불운했던 분으로…."
― 안철수 씨의 책도 냈는데 어떤 사람 같았나?
"성격이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다. 많은 생각 끝에 행동을 한다. 소위 성찰형이다. 이분이 낸 책들의 기조는 변한 게 없다. 거의 똑같다. 옛날에 했던 말을 반복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기본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늘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세월이 흘러도 정신적 성숙이나 사색의 깊이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것은 대단한 철학이나 기술이 아니다. 가령 '정직하자, 약속을 지키자, 남에 대한 배려를 하자.'는 것은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덕목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런 단순한 덕목을 실천만 해도 충분하다."
―김영사는 현재 직원 110명에 매출액은 420억 원이다. 국내 단행본 출판사에서 규모로는 3위쯤 된다고 들었는데.
"1등이냐 2등이냐 하는 순위, 매출액 규모 같은 것은 망상이라고 본다. 출판사 사장들은 매일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확인한다. 나는 그걸 하지 않는다. 나도 인간인지라 20등 하면 10등, 10등 하면 1등 하고 싶어진다. 순위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덜 팔리고 안 팔려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책을 낼 수가 있다."
―어떤 기준으로 책을 출간하는가?
"지식과 정보에서 선도하는가, 고정관념을 깨는가, 감동을 주는가, 우리가 몰랐던 것인가 등이다. 필요한 책을 기획하면 독자들이 택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당초 1만~2만 독자만 읽어줘도 좋겠다며 찍었지만, 110만 부쯤 팔렸다."
―당신은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나?
"출판 일이 너무 힘들어 다음 생에는 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최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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