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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라면, 나윤선 y 샹송의 전설 미레이유 마띠유가 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부에노(조운엽) 2016. 4. 26. 10:38

 

 

나윤선은 “‘노래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노래하다 보니

내 스타일이 생긴 것 같다. 무식해서 용감한 경우”라며 활짝 웃었다.

 

 

샹송의 전설 미레이유 마띠유가 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싶다니

 

 

프랑스 파리의 샤틀레극장 공연을 마친 재즈 가수 나윤선 씨는 신문 기사를 읽은 부친으로부터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딸아, 정말 자랑스럽다.

그녀는 부친에게서 받은 문자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극장을 전석 매진시키고 엄청난 환호와 함께 세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받은 그녀는 부친 나영수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만의 자랑이 아니다.

그녀의 오랜 음악 동료인 스웨덴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의 말처럼 모든 한국인의 자랑이 됐다.

며칠 전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그녀의 공연도 빈 좌석 하나 없었고 앙코르 역시 세 번 이어졌다.


고교 때부터 샹송을 좋아했고, 건국대 불문과 2학년 때 프랑스문화원에서 주최한 샹송 경연대회 대상을 받은 나윤선은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음악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1994년 김민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해 가능성을 인정받은 뒤로 그 꿈은 더 단단해져 갔다.

어느 날 그녀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95년 파리로 음악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유럽의 모든 매체가 인정하는 최고의 재즈 가수 자리에 올랐다.

나윤선이 샹송 대신 재즈를 택한 것은 샹송에 프랑스 문화가 너무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부르주아 가족의 아침' 같은 노래 가사엔 '은수저로 차가운 수프를 마시네' 같은 대목이 있는데 그걸 동양인의 얼굴로 부르기엔 부담이 컸어요.


최근 나윤선은 프랑스의 대표적 여가수 미레이유 마띠유에 이메일을 받았다.

통산 1억5천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하며 '제2의 에디뜨 삐아프'로 불리는 전설적 샹송 가수다.

그녀는 나윤선 최근 앨범에 실린 노래 '러멘트(Lament)'를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해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했다.

내년 자신의 데뷔 50주년 기념 음반에 싣겠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어요? 미레이유 마띠유가 직접, 저한테 그리고 제가 작곡해 부른 노래를 녹음하고 싶다는 거에요. 이건 에디뜨 삐아프가 제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과 똑같은 일이에요. 어떻게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나윤선은 2002년 프랑스 남부 도시 막시악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에 초청받았었다.

그때만 해도 페스티벌 한쪽 무료 공연에 서는 처지였다.

그러나 작년 그녀는 이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인 7천 석짜리 극장을 가득 채운 가수가 됐다.

이 공연의 앙코르에서 그녀는 감격에 겨워 엉엉 울고 말았다.

독일 음반사 액트(ACT)와 전속 계약을 한 뒤로는 '액트를 먹여 살리는 가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0년 내놓은 음반 '세임 걸(Same Girl)'은 10만 장 이상 팔렸고, 지난달 발매한 신보는 이미 3만 장을 기록했다.

프랑스 재즈 차트에서는 1·2·3위를 휩쓸었다.

세계 최고 재즈 음반사 '블루노트'를 필두로 수많은 회사에서 '전속 기간이 끝나면 우리랑 일하자.'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나윤선은 올해 미국에 본격 진출한다.

세계 최고의 재즈 무대로 꼽히는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도 선다.

그녀는 '짱짱한 뮤지션들이 함께 음반 내자는 제안도 무척 많이 하지만 아직은 내 음악을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Mireille Mathieu

 

 

'아비뇽(Avignon)의 참새'라고 불리는 '미레이유 마띠유(Mireille Mathieu)'는 프랑스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가난한 집 14명의 형제, 자매 중 맏딸로 태어나 마치 현대판 신데렐라처럼 동화 같은 삶을 살았다.
그녀의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알려져 처음으로 무대에 출연한 것은 4살 때였다.
그녀의 꿈은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처럼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15세에 아비뇽의 샹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하였다.

프랑스 국영 TV방송국은 1963년에 세상을 떠난 에디뜨 삐아프의 대를 이을 가수를 발굴하는 텔레 디망쉬(Tele Dimanche)라는 아마추어 샹송 콘테스트를 열었다.

19살, 작은 체구의 '미레이유 마띠유'는 '에디뜨 삐아프'의 명곡 'L’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를 불러서 우승을 했다.
매스컴에서는 '에디뜨 삐아프'가 다시 탄생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리고 그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가수 조니 할리데이의 매니저가 그 프로를 보고 미레이유 마띠유와 바로 계약을 맺고 4주 만에 그녀를 모든 샹송 가수들의 꿈인 올랑피아 극장 무대에 서게 하였고,
그가 죽기 전까지 그녀와 함께 하였다.

그녀는 다음 해 '사랑의 신조'가 히트하면서 스타가 되었다.
폴 모리아가 작곡한 데뷔곡 'Mon credo(나의 신조)' 란 그녀의 샹송 모음집이 무려 17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녀는 하루 사이에 애수에 젖은 아름다운 목소리의 가수로서 성공의 길을 걷게 된다.
이로 인해 '미레이유 마띠유'는  프랑스의 노래하는 대사 역할을 하게 되며 최고의 가수로 성장한다.

그녀는 9개 국어로 1,200여 곡을 불렀는데, 그녀의 공연은  Tom Jones 등 세계적인 가수가 따라다녔고,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억5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도 남겼다.


프랑스에서는 '미레이유 마띠유(Mireille Mathieu)'를 '샹퇴뢰즈 아 브와(Chanteureuse A Voix)'라고 부르는데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게 목적인 가수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불리는 가수들은 마이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한 오페라적 발성을 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루이스 마리아노(Luis Mariano)'와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가 들었던 그 호칭을 '미레이유 마띠유'가 이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