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놈펜 까나리야 공단 앞의 봉제 인력 시장의 새벽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세상 인연
약 육 년 전에 캄보디아 봉제공장과 인연을 맺어 프놈펜에 처음 와서 일 년 남짓 노무관리와 시설 보수 관련 일을 했다.
당시 그 공장에서 납부기한을 제때 못 맞춰 배에 실어 보내야 할 옷을 운임이 비싼 비행기에 몇 번 실어 보내고 회사 경영이 어려워져 몇 달 급료가 밀리다가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마도로스 출신이 경험 없는 봉제 일을 하면서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던 비행기 몇 번 태워 납품하면, 회사 망한다는 이야기를 체험했다.
몇 센트 떼기 박한 공임으로 공장을 유지하는 봉제 회사에서 관리가 잘 못 되어 납부기한을 못 맞추면, 클레임 물어주고 그 여파가 줄줄이 다음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연쇄 부실로 이어진다.
한 일 년 남짓 묵고살려고 팔자에 없는 캄보디아어 기초 회화 강사 노릇으로 외도한 것 이외에는 그런 인연으로 캄보디아 봉제와 공장 보수 관련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처음 있던 공장에서 창고를 지을 때 만난 현장 책임자가 돈을 빌려 가고 차일피일 미루며 갚지 않아 싫은 소리를 하고 찔끔찔끔 받았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연락이 와서 봉제공장 시설 보수하는 현장 책임자로 일하면서 그 집에서 몇 달 묵고살았다.
처음 일하던 회사의 관리 이사가 실직해서 몇 달 놀 때 캄보디아어 강사하며 조금씩 번 돈으로 매일 술 담배 사주면서 같이 놀아준 적이 있다.
그 양반이 다른 공장의 법인장으로 가면서 수입이 변변치 않았던 글쓴이를 위해 깍두기 직원으로 채용했다.
월급 받는 직원은 맞는데 사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그냥 법인장 재량으로 쓰는, 없어도 그만인 직원인 셈이다.
그래서 사장이 캄보디아에 오면 회사에 얼쩡대지 않고 집에서 쉬는 비애를 겪었다.
그때 재고 관리 일을 했었는데 한 한국인 업자에게 넘긴 옷이 사고가 났다.
스탁이라고 말하는 재고는 완성된 옷을 바이어에게 보내고 남은 것으로 치수도 맞지 않고 불량품이 좀 섞여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옷을 한꺼번에 파는 게 좋지 골라 팔면 또 재고가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업자가 당장 팔 수 있는 괜찮은 몇 가지 옷을 처분하고 나머지를 못 팔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하나도 못 팔았다고 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법인장이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사람이라 다 반품하라 했다.
해서 싣고 오려고 했더니 옷이 부족했다.
두어 제품은 이미 팔아 쓰고 두 손 든 것을 알게 됐다.
그냥 떼이고 글쓴이는 태국에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두고 푸껫으로 날아갔다.
다시 캄보디아에 돌아오니 그 법인장이 재고 옷 사고 쳤던 업자와 봉제를 모르지만, 거짓말을 잘못하는 글쓴이를 묶어 하청 공장을 해서 먹고 살라고 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사람과 또 인연이 됐다.
몇 달 같이 캄보디아 여인들 꽃밭에서 희희낙락 일하다가 일본으로 갈 어려운 우분 와이셔츠를 재하청으로 만들면서 대형 사고가 났다.
봉제에서 있을 수 있는 사고란 사고는 그 옷에서 종합 백화점처럼 다 터졌다.
원청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처지라 재하청 공임을 제때 받지 못해 직원 급료가 밀려 데모가 났다.
원단 조각을 태우고 티브이 방송국에서 나오고 하면서 한국인 관계자는 다 도망가고 얼씬도 하지 않는데 글쓴이 혼자 현장에서 공장과 제품을 지켰다.
하청 공장 공장장은 맞아 죽으려고 하냐고 빨리 나오라고 하는데, 만날 같이 웃으면서 신나게 일하던 공장 직원들에 별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못했고, 공장에서 먹고 살면서 몇 달째 급료도 못 받아 사실 갈 데도 없었다.
법인장이 일하는 공장 사장이 현지인 직원들 급료만 해결해주어 제품을 넘기고 공장 문을 닫게 됐다.
제품을 받아가려고 내 밀린 급료도 준다하고는 도망간 사장에게 받으라고 오리발을 내밀어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현지인 직원들이 몇 달 급료도 못 받고 공장 뒤치다꺼리를 끝내고 허탈해 있는 글쓴이에게 객공 일을 제의했다.
자기들이 객공 직원으로 뛸 테니 나보고 공장에서 오더를 받아오라는 것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 바로 교민지에 광고를 내고 명함을 만들었다.
한 달 넘게 영업하고 기다려도 문의 전화 한 통 오지 않아 안 되는 일인 모양이라고 하고 다른 살길을 찾으려는데 객공 찾는 전화가 왔다.
망한 공장 기숙사에서 같이 자기도 했고 종종 와서 내 돈 빌려 가고 전혀 갚을 생각하지 않는 캄보디아에서 유명한 '사'자 선생이 나인 줄 모르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객공과 유명무실한 노가다 인력 일을 시작하게 됐다.
작년 초에 캄보디아에서 객공 일을 몇 년째 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하루 삼백여 명의 일당 재봉사를 너덧 공장에 보냈다.
혼자 다 관리할 수 없어 캄보디아 객공 회사 세 곳에 하청을 주었다.
금방 빚 다 갚고 부자 될 줄 알았는데 한 두어 달 반짝하고 원래대로 사오십 명 선에서 왔다 갔다 했다.
캄보디아에 와서 처음 일했던 공장 공장장이 다른 회사에서 일하면서 우리 객공 직원을 몇 년째 계속 썼다.
얼마 전 납기가 바빠 객공 스무 명을 더 보내달라 해서 남으면 돌려보내더라도 삼십여 명에게 말해놓았다.
그런데 그날 새벽 비가 엄청 왔다.
원래 출근하던 직원 십여 명 빼고는 한 명도 오지 않고 다 펑크를 냈다.
급히 전에 같이 일했던 친하게 지내는 캄보디아 객공 사장 사림에게 열 명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보내준다던 재봉사들은 오지 않고 시간만 흘러 점심시간이 되어 계속 전화하니 밥 먹고 꼭 온다고 했다.
오후 한 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포기하고 다음 날 우리 직원 스무 명 넘게 데리고 공장에 갔다.
그런데 그 사림이라는 작자가 자기 직원 이십여 명을 데리고 먼저 와서 현장에 앉아 있는 것이다.
납기 바쁜 공장에서 싸울 수도 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같이 일했다.
그리고 현장 관리자들이 사림에게 커미션을 달라 하고, 커미션을 주지 않는 우리 직원들에게 엄청난 갑질을 해댔다.
결국, 우리 고참 직원들이 그 공장에서 일 못 하겠다고 보이코트해서 몇 년째 일하던 그 거래처가 떨어졌다.
원수가 따로 없었다.
객공 일이 끊기고 놀다시피 하면서 노후를 생각해서 캄보디아 은퇴 이민 공동체를 준비하고 있는데 몇 주 지나서 사림 부부가 집에 찾아왔다.
지난 일에 대해선 사과나 일언반구 없이 한국 공장에서 객공을 구하는 것 같은데 같이 영업 가자고 한다.
얼마 전에 한 번 영업 갔던 공장이라 면도도 하지 않고 낮술 먹고 시큰둥하게 갔다 왔는데 그 공장은 난리였던 모양이다.
납기를 못 맞춰 비행기에 태워 보내야 하는데 그 수량이나마 줄이자는 의도였다.
뒷날부터 사림과 같이 우리 객공이 들어가면서 지금은 백삼사십 명이 주야로 일하게 됐다.
비행기 태운 여파로 다른 제품도 다 납기가 바빠 매일 야근에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벌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장의 미래는 별로인데 어쩌나. ㅜㅜ
인연,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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