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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지만 한편으로 짠한 이은하

부에노(조운엽) 2020. 5. 13. 09:10






재미있지만 한편으로 짠한 은하 씨 이야기

 

 

배경 음악 :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kpX-msZbiyg

                미소를 띠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v=VSQpAogu5Os

 

 

동시대를 살아온 가수 이은하.

학교 가는 것이 별로 재미있지 않았던 시절에 라디오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밤을 지새우며 듣던 음악 프로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았지만, TV에 종종 나왔던 그녀를 보면 무척 반가웠다.

동갑인 줄 알았던 그녀의 이야기가 재미는 있지만, 한편으론 짠한 생각이 든다.

 

그녀는 만 12살에 음반을 내고 데뷔했고 그때 본의 아니게 나이를 세 살 올렸다.

그녀의 대표곡인 '밤차'를 불렀을 때 그녀는 고작 16살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어려 가슴에 뭔가 넣고 노래를 불렀는데 한참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가슴이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고 말했다. 

77년 처음 10대 가수에 선정된 이후 85년까지 무려 9년 연속 10대 가수에 선정되었고 가수왕도 세 차례나 차지했으며, 혜은이와 쌍벽을 이뤘던 최고의 여자 가수였다.

그리고 전 방송국 가수왕을 해본 전설의 가수로 남았다.

즉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고고 리듬부터 소울, 록, 발라드, 재즈, 트로트, 디스코 등 여러 장르를 다 소화했다.

 

그녀는 국민학교 6학년이던 1973년 '임마중'이 실린 첫 음반을 냈다.

신인가수 후보에 오르면서 주민등록등본을 내야 했는데 당시 만 16세였던 사촌 언니 등본을 일단 내고 다음 해인가 공문서위조가 겁이 나서 정식으로 호적상 나이를 1958년생으로 바꿨다.

그때 '58년 무술년 개띠' 하고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사실 1961년생이지만 말이다.

이은하는 2007년 다시 법원에서 생년월일 정정 허락을 받아 본래 나이로 돌아왔다.

이때 이름도 본명 '이효순' 대신 '이은하'로 바꿨다.

가수 데뷔하느라고 속였던 나이는 되찾았지만, 스타가 되기 위해 지었던 예명은 지켰다.

데뷔 34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이은하'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악극단의 아코디언 연주자였고 지방 공연을 데리고 다니면서 '베이비 쇼'에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다.

하춘화 씨도 '베이비 쇼' 출신이다. 

그러나 이은하는 서울 홍릉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베이비 쇼’를 그만두게 된다.

어머니가 ‘애까지 딴따라 시킬 셈이냐.’며 아버지를 나무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를 이미자 같은 가수로 키우고 싶어 오아시스 레코드 사에 찾아갔다.

그때 음반을 내준 작곡가가 ‘얘는 이미자가 아니라 제2의 김추자.’라고 했다. 

그때부터 김추자 노래를 부르면서 연습을 했다. 

열두 살에 부른 ‘임마중’을 들어보면 전혀 초등학생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허스키하다’는 얘기를 들은 건 1976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고 나서이다. 

그때 작곡가가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 노래를 시켰다. 

이 노래가 두 옥타브 올라가는 ‘하이 C’ 노래이다. 

나중에는 목이 너무 아파서 침도 못 삼킬 정도가 되어 더 못하겠다고 하자 ‘한 번만 더 불러보자.’라고 했다. 

그때 부른 게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다. 

이은하가 어려서 감정이 잘 안 나오자 작곡가가 머리를 써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연습시킨 것이다.

 

 

1977년 ‘밤차’를 발표해서 대히트를 쳤다.

그 노래가 ‘멀리~ 기적이 우네.’ 하고 한참 뜸을 들이다 보니 그게 어색해서 손가락으로 하늘 여기저기를 찔렀다. 

그해 가을에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가 개봉됐고 존 트라볼타 역시 이은하처럼 손가락으로 죄 없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은하도 덩달아 ‘디스코의 여왕’이 됐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 돼 혜은이의 ‘제3한강교’가 나왔다. 

혜은이 씨와 같은 시대에 가수 활동을 하다 보니 서로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 

혜은이는 청순가련형 예쁜 가수, 이은하는 상대적으로 씩씩하고 덩치 큰 여가수로 자리매김했다. 

“분장실에 둘이 같이 있으면 PD들이 와서 혜은이에게는 ‘우리 혜은이, 밥은 먹었니?’ 하고, 배고파서 김밥 한 줄 먹고 있는 어린 이은하한테는 ‘이 자식, 돼지같이 또 처묵냐?’라고 했단다.

그리고 혜은이 씨 뒤에는 거장 길옥윤 씨가 턱 하니 버티고 있지 않았던가.

 

이은하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동양방송이 없어질 때, 마지막 쇼에서 너무 울어 한동안 TV 출연을 못 하기도 했다.

그때 이은하가 첫 무대에 나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불렀는데, 객석에서 강부자와 장미희가 울고 있는 걸 보고 노래하는 동안 계속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KBS와 TBC 통폐합 기념 쇼에 출연하러 갔더니 담당 PD가 ‘야, 너는 그렇게 사태 파악이 안 되냐? 그냥 가라.’고 했단다.

그로부터 몇 달간 그날 운 사람은 KBS에 못 나갔다고 한다. 

이은하는 1986년 ‘미소를 띠며…’를 다시 히트시키지만, 그해 가을 정수라의 ‘난 너에게’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10대 가수에도 끼지 못하는 수모를 겪는다.

1989년 전영록과 함께 ‘돌이키지 마’가 담긴 음반을 냈으나 이미 이은하의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한참 활동해야 할 20대 후반에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92년에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을 아주 확 말아 드셨다.

사기꾼들이 아버지를 건설 관련 회사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다 빼먹고 튄 거다.

그때 그녀가 살던 정릉 단독주택이 시세로 8억 원 정도 했다고 한다.

나무도 많고 연못도 있던 집이다.

그걸 빚쟁이들이 5억에도 안 쳐주어 결국 경매에서 6억7천만 원에 낙찰됐다.

그때 그걸 5억만 쳐줬어도 어떻게든 빚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때 집에 귀한 나무가 무척 많아 어머니가 낙찰자에게 ‘나뭇값으로 500만 원만 쳐달라.’고 하니까 ‘그냥 뽑아 가세요.’ 하더라나.

그때부터 개고생이 시작됐다.

딱 10년 만인 2002년 말에 모든 은행 빚을 청산했다.

이자까지 쳐서 한 20억 넘게 아버지 빚을 다 갚았다.

뭐로 빚을 갚았을까?

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가수가 노래해서 갚았지 다른 게 뭐 있겠나.

밤업소에 나갔다.

그때 그녀가 서른 살이었는데, 집도 절도 아무것도 없었다.

역삼동 월세방에 살면서 저녁에 의정부나 동두천에서 밤무대 일을 시작해서 남양주, 청량리 돌고 신림동, 영등포, 인천까지, 하루에 7, 8군데 뛰면 새벽 2~3시쯤 끝났다.

그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다고 한다.

눈 뜨면 부도수표와 어음이 돌아오는 데 정말 정신없었다고 했다.

새벽에 집에 돌아와 전화 음성 녹음기를 틀면 온갖 욕설과 협박이 녹음돼 있고...

아버지는 창피하니까 두문불출하시고 그녀는 노래만 불러왔으니까 아는 게 없고...

정말 약 먹고 칵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단다.

2015년에 다시 아버지가 사채 수십억 원을 못 갚아, 법원의 개인파산 절차에서 그녀가 지금의 수입으로는 채무 변제가 어렵다고 판단해 파산 폐지와 면책 허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녀가 말했다. 

“너무 어려서 스타가 되어 추락하던 그때 기분은 뭐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감당하기 힘들어 너무 혼란스러웠죠.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이 산이에요.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이제야 그걸 알았죠. 제가 부모라면 어릴 때 연예인 안 시켜요. 남들처럼 정상으로 학교에 다니고 그다음에 뭘 해야 무슨 어려움이 닥쳐도 극복할 힘이 있어요. 너무 어려서 가수하고 인기 얻고 그러면 바보가 돼요. 안타깝죠.”

 

이은하가 음악 외에 애정을 쏟는 것은 골프다.

구력 30년이 넘는 그녀는 KLPGA 연예인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친 건 10년가량밖에 되지 않는데 승부욕이 없어서 그리 잘 치지는 못하고 보기 플레이 정도 한다.’고 말했다.

지금 쿠싱증후군과 척추 전방 전위증이란 병들로 투병 중이며, 주사와 약 등으로 살이 많이 쪘다고 한다. 

지난 4월에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하여, 비록 투병으로 인해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대단한 가창력을 보이며 우승을 했다고 한다.

 

‘인기’라는 건 무엇인지 그녀에게 물었다.

“물거품이죠. 구름 위에 뜬 신기루에요. 살아보니까 사람은 누구나 굴곡을 겪게 되더라고요. ‘부모’라는 노래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고 하잖아요. 부모가 되어 봐야 비로소 부모 마음을 아는 거죠. 후배 연예인 중에 너무 까칠한 애들을 종종 봐요. 그래도 저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지금 말해봐야 알아듣지 못해요. 연예인들이 어디 가서 대접만 받지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앞으로 십 년 뒤를 못 보기 때문에 그래요.”


연예인으로 살아온 것에 후회는 없는지 또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제가 갈 길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저를 보니 ‘가수 이은하’로 살아온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더라고요. 그리고 지금도 노래라는 희망이 있잖아요. 한국에서 여자가 이 나이에 신나게 노래부르고 돈 버는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녹음실에 와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뭔가 제 역할을 하는 것 같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저도 좀 더 신중하게 돼요.”

그녀는 재즈와 트로트 가수로 다시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