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음악방

라틴 민중 음악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

부에노(조운엽) 2020. 5. 14. 07:07






Gracias a la vida, Violeta Parra




배경 음악 : Gracias a la vida, Violeta Parra https://www.youtube.com/watch?v=UkIyMxDIo_k

               Mercedes Sosa y Joan Baez https://www.youtube.com/watch?v=ryn4BTGA28E 

               열일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Volver a los 17), Violeta Parra https://www.youtube.com/watch?v=Oe1o13CItv4




한국에 김민기, 양희은이 있다면 남미에는 비올레따 빠라와 메르세데스 소사가 있다.

비올레따 빠라는 칠레의 시인이자 싱어 송 라이터이다.

그녀는 산티아고 대학 박물관장까지 지낸 민속학자로서 민속 음악을 채집하다 본인이 직접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대모가 된 민중가수이자 칠레의 반독재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녀가 작사 작곡해 직접 반주하며 부른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는 독재 치하에 신음하는 민중에게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로 칠레 민중의 노래가 되었고 집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불렸다.

비올레따 빠라의 음악은 칠레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칠레의 가수 이사벨 파라와 앙헬 파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소사는 노래로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에 맞서다 1981년 라플라타에서 열린 공연에서 청중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되고,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7, 80년대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그라시아스 알 라 비다'는 죤 바에즈 등 많은 가수가 불렀는데 비올레따가 부른 것과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것이 압권이다.


삶에 감사합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걸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흑과 백을 구분하고,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내 사랑하는 이의 소리를 듣도록 두 귀를 주셨습니다. 


글쓴이도 남미 곳곳에서 이 노래를 들었는데 안데스산맥을 넘을 때 볼리비아 국경 고원 도시에 머물던 어느 날 새벽, 회색의 어둠을 밀어내고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광장에 울려 퍼지는 이 노래에 가슴이 뜨거워져 눈물을 찔끔하며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또, 산띠아고 데 칠레에서 경찰도 겁을 내 못 들어가는 우범지역에 마약으로부터 주민과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한국인 신부님의 평화 시위 때 그분의 부탁으로 찍사로 따라 나가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바짝 쫄은 가운데 이 음악이 울려 퍼져 정신을 차린 적이 있다.

목숨 걸고(?) 찍은 그 사진글은 DAUM 메인에 올라 20여만 명이 봐서 기뻤다.


비올레따 빠라는 칠레 남부 산 까를로스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악기를 잘 다루었지만 한량이어서 생활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노래를 잘해 때때로 마을 잔치에서 노래 품을 팔던 어머니가 이에 질색하여 자식들이 기타를 못 만지게 할 정도였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식이라고는 큰아들뿐이었다.

그 덕에 큰아들은 칠레를 대표하고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니까노르 빠라이다.

반면 나머지 동생들은 처음에는 잔돈푼이나 받는 재미로, 나중에는 먹고살기 위해 거리와 식당을 돌아다니며 노래 동냥을 해야 했다.


오빠는 평생 이에 대해 미안해했다.

특히 동생의 천부적인 끼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죽자 제일 먼저 비올레따를 산띠아고 데 칠레로 불러 어떻게든 학교에 다녀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니까노르 자신도 가난한 고학생 처지라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결국 비올레따는 밤무대를 전전하며 먹고살아야만 했다.

담배 연기 자욱한 바에서 새벽까지 노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두 번의 이혼이 말해주듯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는 못해 비올레따는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삶과 맞서 나갔고 적어도 파국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비올레따는 투사였다.

혹독한 삶 속에서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것이 바로 민속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다.

칠레 민속 음악의 보고인 산 까를로스 출신인 데다, 명연주자인 아버지와 노래꾼 어머니를 둔 비올레따에게 산띠아고에서 유행하는 민속 음악은 도시민의 취향에 맞춘 허접한 것으로 보였다.

처음 상경했을 때부터 비올레따는 자기 나라 민속 음악을 제대로 알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올레따의 강인함과 열정을 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오빠 니까노르가 동생에게 민속 음악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1953년 그녀는 본격적으로 민속 음악 채집에 나섰다.

그녀는 산띠아고 인근 동네의 이주민 촌은 물론 시골을 훑으며 다녔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았다.

십 리 길이 멀다 않고 기타를 메고 하염없이 걷고 노새를 얻어 타고 갔다.

낯선 마을에 가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 노인들이 사는 곳을 물었다.

노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춤을 추라면 추고, 노래를 부르라면 불렀다.

죽어가는 노인의 말벗이 되어주고 옛 기억을 더듬게 하기도 했다.

녹음기는 가난한 비올레따에게 사치였지만, 그것이 없다고 작업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마주치는 노래마다 어김없이 그녀의 머릿속 깊이 새겨져, 공책에 연필로 적었다.

그녀는 홀로 칠레 대학 민속연구팀보다 더 많은 노래를 채집하는 억척을 보였다.


비올레따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아 근대화와 도시화로 잊혀가던 민요가 그녀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자 감동한 청취자들의 편지가 많이 왔다.

그녀는 수천 통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가난한 살림에 우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자 청취자들에게 호소했다.

이번에는 쓰지 않은 봉투, 편지지와 우표가 넘쳐났다.

무명의 밤무대 가수가 억척스러움 하나로 일궈낸 결실이었고, 그래서 비올레따는 그 감격의 순간을 회고하며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진짜 인생은 서른다섯 살이 넘어야 시작돼요.”


1955년칠레의 예술 대상을 받았을 때 비올레따 빠라는 드디어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칠레 민속 음악의 대표성을 인정받으면서 바르샤바 국제민속대회에서 초청장이 왔다.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달짜리 딸이 마음에 걸렸지만, 칠레 민속 음악을 타국에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가족을 두고 주저 없이 바르샤바로 떠났다.

그렇지만 대회 기간 중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잊기 위해 오히려 미친 듯이 공연에 몰두했고, 대회가 끝난 후에는 유럽을 돌아다녔다.

유럽 전체에 칠레 민속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할 작정이었다.

그것이 두 번째 이혼의 발단이었다.

첫 번째 결혼과 마찬가지로 일에 대한 열정이 파국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수록 일에 매달렸고 유럽에서 굵직한 성과를 올렸다.

파리에서 '칠레의 노래'라는 음반을 녹음하고, 인류 박물관과 유네스코에 칠레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칠레 민속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칠레 수공예품 전시회를 했다.

영국에서도 방송에 출연하고 BBC 방송국 자료실에 자신의 노래를 남겼다.

칠레 민속 음악을 소개할 기회만 생기면 어디든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마치 민속 음악을 채집하러 칠레 촌 동네를 돌아다닐 때처럼 말이다.


비올레따가 칠레로 돌아온 것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벨과 앙헬이 파리의 샹송 카페에 영감을 얻어 1965년 산띠아고 시내에 연 라이브 카페가 문을 열었을 때였다.

카페는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었고, 사회성과 서정성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한 노래 운동인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ón)의 모태가 되었다.

유럽에서 돌아와 카페가 활성화되자 비올레따는 가슴이 벅찼다.

드디어 칠레 사회가 전통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중남미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인 빅또르 하라가 이 카페에서 노래 부르며 유명해졌다.

그는 칠레 독재자 삐노쩨뜨의 군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무참히 총살당했다.


그리고 그녀는 산띠아고 외곽인 라 레이나에 천막을 치고 숙식하며 민속 음악을 공연했다.

그러나 민속 음악의 전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내디딘 그 발걸음은 비올레따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버렸다.

산띠아고 외곽까지 일부러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약속된 구청의 지원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여전했고 마지막 남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던 이는 그녀의 직선적인 성격에 진저리치다 떠났고, 건강마저 비올레따의 발목을 잡았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녀는 라틴 민중 음악으로 유명한 'Gracias a la vida'를 작사, 작곡한다.

그녀가 직접 반주하며 부른 이 노래는 칠레인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노래이다.

1973년 삐노쩨뜨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칠레 사회는 암흑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죽고 실종되었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 희망의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실종된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혹독한 탄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의 희망을 잡으려 했다.

칠레 민중의 노래, 혁명의 노래가 되어 집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불렸다.


이 곡의 노랫말은 삶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지만, 비올레따 자신은 더 내려갈 곳이 없었다.

민속 음악 전당으로 키워보겠다고 생각한 그 천막에서 결국 비올레따는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았다.

그리고 분신 같던 기타에 엎어져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평소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죽음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선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다 술 취한 손님이 경우 없이 대하면 기타가 부서지도록 머리를 내려치던 당찬 여인이었던 시절이, 비록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꿈 많던 소녀였던 그때, 산띠아고로 올라온 뒤 처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바로 그 나이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일까?

비올레따 빠라는 죽기 전에 '열일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Volver a los 17)'이라는 노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