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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김민기

부에노(조운엽) 2020. 5. 12. 08:48






김민기의 친구



배경 음악 : 김민기의 친구 https://www.youtube.com/watch?v=siMfVqkTDAc



김민기는 싱어 송 라이터로 우리나라 포크송 역사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가 불순하다고 독재정권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현재 뮤지컬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금도 말한다.

자신의 노래는 불순하지도 않았고 반체제를 염두에 두고 만들지도 않았다고.

당시 김민기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높으신 분들은 자신들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공개적으로 탄압하다가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은 것 때문인지 김민기는 활동 금지만 하고 자멸하도록 방치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했다고 한다.

이때 허문도가 김민기를 회유하기 위해 백지수표를 내밀며 원하는 액수를 적으라고 했으나 물론 김민기는 받지 않았다.

김민기는 노래 때문에 보안사 등 여러 기관에 가서 취조받으며 조 터졌는데 전혀 의도 없이 만들었고 그들이 정권을 잡기 전에 나온 노래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에 투사로 기억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그는 그저 순수했고 다만 학생들이 데모할 때 그의 노래를 부른 탓에 자신이 불행해졌다고... 


김민기가 서울 미대 회화과 1학년 때였다.

가수 서유석의 말에 의하면 김민기는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늘 나타났다고 한다.

명동 길에서 마주치면 구두닦이로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혼자가 아니고 친구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듀엣을 만들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혼자 노래를 했다.

밥 딜런의 노래를 주로 불렀고 중저음의 음색과 기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 평론가 이백천 씨의 말이다.

어느 날, 노래 사이에 이야기를 섞어가며 진행을 하는데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제기랄, 영어 안 쓰면 말 못 하나?”

돌아보니 김민기였다.

그때 김민기의 나이 스물, 나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영어 좀 안다고 자랑삼아 영어를 사용하지는 않았고 평상시 쓰던 말이 자연스럽게 몇 마디가 들어갔을 것이다.

부아가 확 오르는 것을 겨우 누르고 넘어갔다.

다음 주였다.

김민기가 노래했다.

밥 딜런의 곡이었다.

아주 잘 부른 노래였다.

내가 한마디 했다.

“영어 노래 말고 뭐 우리말 노래 없을까?”


2주일 정도 지난 후 김민기가 다시 와서 노래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르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이렇게 김민기의 '친구'가 태어났다.

물가에 친구들과 놀러 갔는데 한 친구가 익사했단다.

그래서 만든 노래라고 했다.

뱃속에서 감돌다가 나온 것만 같은 낮은 음성의 노래였다.


또, 송창식, 서유석, 김도향, 윤형주 등 젊은 통기타 가수들의 활동무대였던 명동 '청개구리'의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무렵 서강대학교에 다니던 재동초등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되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래하던 그를 위해 데뷔곡인 '아침이슬, 작은 연못' 등을 작곡해 주었다. 

김민기의 노래는 맑고 청아하면서도 꾸밈없이 당당한 양희은의 목소리에 실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양희은이 70년대의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것에 크게 공헌했다.

'아침이슬'은 한국인들이 뽑은 애창곡 중 하나이다.

그것은 대중가요가 아니라 이미 국민가요가 되었다.


김민기는 주로 민중들의 현실이나 사회 모순을 고발하는 현실 비판적인 노래들을 많이 만들어 힘든 시절을 보냈다. 

첫 앨범을 발표한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부른 노래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고, 유신체제가 시작된 1975년 긴급조치 이후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포함한 대부분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다. 

대학 시절 인천에서 노동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야학을 만들어 불우한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1974년 카투사에 입대해 군 복무를 했으나 1975년 초 10월 유신 반대 운동권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렀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았고,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그의 노래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하였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인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보안대 조사가 끝난 뒤 영창에 갔다가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는데, 경기고 선배였던 소속 부대 수색중대장의 도움을 좀 받았다고 한다.


1977년에 전역한 뒤에도 공연이나 음반 발매 등 공적인 활동에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정치적 탄압으로 정상적인 가수 생활이 불가능했던 김민기는 전북 김제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촌의 청년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졸업 이후에도 미술 활동이나 교편을 잡지 않은 채 막노동 등으로 입에 풀칠하며 양희은의 음반 '거친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 주었다.

하지만 음반 발매 때는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장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금 조치를 받았다. 


6월 항쟁 때 서울시청 광장에서 이한열 열사 노제에 갔는데 그 당시 백만 군중이 다 함께 아침 이슬을 부르는 것을 보고는 '아, 이 노래는 더는 나만의 노래가 아니구나' 하고 공식 석상에서 '아침 이슬'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1991년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극단 학전의 연출자로만 묵묵히 일할 뿐, 인터뷰 요청이나 각종 공연 섭외도 모두 거절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침 이슬의 김민기로만 기억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자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여전히 과거의 한순간만을 기억하면서 화석화된 김민기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요즘은 김민기가 무명 가수 취급을 받곤 하는데,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연주와 편곡에서 혁명을 가져온 게 신중현이라면, 내용적인 면, 노랫말, 감성 등에서 혁명을 가져온 음악가는 김민기라고 평가한다.

노래를 작곡할 때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즉석에서 작곡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잠시 언급되기도 했다.


김민기가 창단한 극단인 '학전' 출신 배우로는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조승우 등이 있으며 가수로는 김광석, 유재하, 나윤선 등이 있다.

김광석은 김민기의 극단 '학전'의 배우로서 데뷔했다.

김광석이 큰 히트를 해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땡볕 아래 많은 사람이 학전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고 한다.

김광석 사후, 김광석 추모사업의 회장을 맡았다.


절친을 넘어선 송창식 씨는 김민기에 대해 '아마 김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나는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민기 씨가 우리 종친회 총무 용필이 형과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물론 글쓴이는 안주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

그때 두주불사 용필이 형이 노래방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조용필이 김민기보다 늦게 활동한 데다가 주요 음반이 현대가요이기 때문에 김민기보다 젊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김민기가 조용필보다 1년 후배라고 한다.

독재정권의 희생자 중 한 명인데 아이러니하게 그래서 오랫동안 대중에게 잊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