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리비아 브레가항과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부에노(조운엽) 2020. 8. 3. 06:45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리비아 브레가항과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배 몇 척 접안할 수 있는 작은 항구 마사 엘 브레가항에서 비료 포대가 컨베이어로 해피 라틴호 선창에 쏟아지고 있다.

선창 안에서 인부들이 가지런히 쌓는다.

상륙 나가려다가 화물 선적을 진두지휘하는 1항사와 만나 데크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어이, 국장님, 밖에 뭐 볼 거 있어요?"

"에이, 1항사님, 사막에 뭐 볼 거 있겠어요. 언제 여기 다시 올지 모르니 사진도 찍고 가슴에 담아 두는 거죠."

내 대답에 1항사가 말했다.

"서베이어가 그러는데 여기가 2차대전 때 군수 하역항이었대요. 탱크도 내리고 보급품과 군인, 상인들이 북적댔다네요."

"그래요? 지금 부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아~ 어제 저 사막 한쪽에서 본 게 탱크 바퀴 자국이었나?"

"하하하~ 뭔 탱크? 사막에서 사오십 년 된 탱크 자국이 남아있겠소? 천상 국장님은 개그맨으로 나가든가 해야지 만날 뻥이셔. 혹시라도 바다에 빠지면 주디만 뜨겠소."

 

제2차 세계대전 때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롬멜 장군이 본국의 지원군과 보급을 받지 못해 후퇴하던 중 리비아의 브레가항에서 전차와 보급 물자를 받았다고 한다.

'HAPPY LATIN'호가 지금 화물을 싣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말이다.

브레가항이 작지만 역사가 있는 항구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승자들이 쓴 역사이기에 실제와 다르게 왜곡된 게 많이 있을 것이다.

영미권이나 일본 책만 번역하고 공부한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또 적장의 업적은 우리 편 장군의 치욕이 될 수 있다.

롬멜 장군도 그런 경향이 많은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2차대전 당시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은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지휘관으로 유명했다.

그의 명성은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추종했기에 가능했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는 총통 경호실에서 근무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친해졌고, 이후 그의 출세에 도움이 됐다.

롬멜은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했고 그가 제시하는 비전에 무조건 따랐다.

게다가 히틀러도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 아닌 그를 아꼈다.

원래 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한 히틀러는 귀족 출신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 진급한 기존의 장교들에 대해 열등감과 반목이 있었고, 자신의 심복인 SS 출신의 장교들을 믿었고, 롬멜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

거기다 롬멜이 독일군 참모본부를 무시하는 발언을 자주 했기에 독일군 장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상관은 깔보고 부하는 무시하는 장교로 알려져 인화에 문제가 있었다.

멀리서 롬멜이 오는 걸 보면 발걸음을 돌릴 정도로 부하들은 그를 피했고, 보고할 때면 트집을 잡아 망신을 주거나 의견을 무시해서 다들 어려워했다고 독일 다큐에서 부하들이 증언했다.

이어 옛 부하 중 한 명은 '제 경험으로 롬멜 장군은 다른 독일 장군들과 비교했을 때 대단한 점도 없었고, 어떤 면에선 그들보다 못한 점도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가 아프리카에서 세운 전공에도 논란이 많다.

애초에 동맹국 무솔리니가 사고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리비아에 끼어들게 된 것이라 독일 지휘부 방침은 현지의 이탈리아군을 도와 영국군이 리비아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만 막으라는 것뿐이었다.

당시 독일은 2차대전의 승패가 달린 동부전선에서 소련과의 전투에 전력투구하는 전황이라 북아프리카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롬멜이 전진하여 계속 승리하자 국가전략이고 뭐고 일단 이기면 좋아하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은 커져, 지원은 안 해주고 롬멜이 이집트까지 점령하길 바랐다.

결정적으로 그의 전공의 상당 부분이 철저한 전장 파악과 체계적인 계획으로 한 것이 아니고 즉흥적이고 임기응변에 따라 지휘한 것이라 직관이 빗나갈 경우엔 참담한 피해를 보곤 했다.

특히 1차 투브르크 공방전 때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강공으로 밀어붙여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은 이러한 직관과 감각에 의존하는 전투 지휘 성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보급 문제도 아프리카 전선의 엄청난 거리가 발목을 잡게 된다.

영국군이 퇴각하고 어쩌다 남은 군수물자를 짭짭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무리한 진격을 거듭하여 최대의 약점이었던 보급선이 길어져 항상 보급품과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해군을 돌파해서 간신히 화물을 항구에 내려도 전선까지 수천km가 넘는 거리를 오로지 트럭으로만 수송해야 하고 여기에 더해서 심심하면 영국 해군과 공군에게 공격받는 해안도로 한 개뿐이었다.

병사들이 뭘 먹고 싸우고, 탱크는 기름 없이 어찌 움직이냐고...

 

여기에 적국의 장군을 추어올려 자신들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적인 롬멜 띄우기가 한몫해 그의 명성은 실제 전과보다 과대하게 포장되었다는 논란도 만만치 않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의 의회 연설 일부다.

"이 전쟁의 참상과 상관없이 개인적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2차대전 중 몽고메리 장군 등 영국 육군 단독으로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건 롬멜과의 북아프리카 전쟁이었고 영국군은 졸전을 거듭했다.

자국군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적군 장군을 더 높게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

 

어쨌든 그의 군사적 직관이나 야전에서의 전투 능력 등을 보면 롬멜이 훌륭한 전술 지휘관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롬멜이 전선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지중해를 거쳐 오는 독일의 보급선들은 영국 지중해 함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고, 이미 동부전선에 전투가 시작되어 물자가 부족해진 독일이었기에 전략적 가치가 적은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의 물자지원을 빈번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롬멜은 전선을 넓히는 것이 바보 같은 짓임을 알고도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카이로를 점령하여 영국군 물자를 빼앗아, 유전지대인 중동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여 중동의 패권을 가져가려 하였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슈파이델 장군이 롬멜에게 히틀러를 암살하자고 제의했었는데, 게슈타포가 음모자들을 체포할 때 슈파이델도 역시 잡혔다.

그때 롬멜은 총통에게 슈파이델이 좋은 사람이며 결백하다는 편지를 썼다.

히틀러는 그런 편지에 롬멜도 반역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롬멜에게 기회를 주고자 불렀다.

그에게서 직접 결백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롬멜은 가지 않았고 며칠 후 그는 무장 SS 12명의 포위하에 권총과 청산가리 중 택일하라고 해 약을 먹고 유명을 달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