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미국에서 한 달 안에 만든 만 톤급 리버티 선단

부에노(조운엽) 2020. 8. 6. 06:52

 

아직 두 척이 남아있는 미국의 물량전을 수행했던 리버티급 화물선

 

 

미국에서 한 달 안에 만든 만 톤급 리버티 선단 

 

 

"올 스테이션, 올 스탠바이!"

선교에서 3항사가 외치는 스피커 소리가 마사 엘 브레가항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브리지 여기 폭슬, 감도 좋아요."

"브리지 여기 풉, 감도 좋습니다."

선수와 선미에서 1항사와 2항사의 대답이 크게 들린다.

이어 캡틴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초사, 2항사. 더운데 수고 많아요. 바쁜 거 없으니 천천히 해요."

"라져, 써!"

1항사와 2항사의 씩씩한 대답과 함께 선수와 선미에서 부두에 묶었던 호사 줄이 풀리고 터그보트가 만선이 되어 육중한 'HAPPY LATIN'호를 바다로 끌어당긴다.

방파제를 벗어나니 비로소 시원한 바닷바람이 열 받은 배를 식혀주는 것 같다.

휴~ 아랍 사막지대는 더워도 너무 더워...

 

해피 라틴호는 지중해에서 서쪽을 향해 선수를 돌렸다.

아프리카의 아이보리코스트와 가나에 비료를 풀어주러 간다.

잔잔한 지중해의 푸른 바닷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고 기관지에 낀 사막 모래 먼지가 사그라드는 기분이 든다.

싸롱이 양고기를 구웠다고 식사하러 오라고 말한다.

한 살 미만 양 갈비 촙을 대리점을 통해 100kg 정도 샀다.

우리 선원들 서너 끼는 배부르게 먹을 양이다.

 

배를 부두에서 떼고 정리정돈을 마친 선원들이 삼삼오오 식당으로 모인다.

고소한 양고기 구운 냄새가 식당에 진동하여 군침이 저절로 돈다.

갑판부 선원 한 명이 브레가항에서 인부에게 얻었다고 야자를 발효시킨 소주, 싸대기를 마시라고 가지고 왔다.

사관 모두 고맙다고 인사하고 건배를 했다.

목에서 쐬하게 넘어가며 양고기와 궁합이 기가 막히게 맞았다.

이런 맛에 배를 타지. 

어디 가서 이런 걸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냐고...

아랍 술 싸대기는 아랍어로 '나의 친구'라는 말이고, 우리나라보다 먼저 아랍과 수교하여 중동에 온 북한 동포들이 야자 소주를 싸대기라는 은어로 불렀다고 한다.

 

한참 항해 중에 멀리 보이는 터그보트 여러 대가 끄는 바지선에서 VHF로 우리 배를 호출한다.

선미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한국에서 소련으로 가는 대형 크레인과 중장비, 철재를 싣고 가는 바지 선단이란다.

멀리서도 왔다.

수에즈운하를 통과하기엔 선폭이 넓어 희망봉을 돌아오는 모양이다.

항해사들끼리 인사와 항해 정보를 나누고 동문이 없는지 금방 무선 전화가 끊긴다.

 

인류는 불로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들어 철기 문명이 생겼다.

철은 지구에 가장 많은 광물로 고대부터 무기는 물론 갑옷과 방패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인류에게 가장 친숙하고 유용한 금속 재료로 근대문명은 철 이용과 함께 발전했다.

일반 생활 물건 대부분이 철로 만들어져 있고 우리는 철로 된 자동차와 배를 타고 철 다리를 건넌다.

철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전부 부식되어 다른 금속을 넣어 합금으로 만들어 더 강하게 만든다.

스테인리스가 대표적으로 금속 중에서 절대 강자지만 대부분의 산에 부식된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낮은 온도에 상당히 취약하여 부서지기 쉽다.

타이태닉호 침몰 사건도 물론 빙산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날씨가 추워서 선박 강철의 강도 저하로 더 쉽게 깨진 것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만 톤급 리버티 화물선을 이천여 척 건조하여 추위에 12척을 잃었다.

한 달 만에 급조한 싸구려 선박이라 저온의 바닷물에 저절로 두 동강이 나서 가라앉은 것이다.

 

리버티선은 선박 전체를 몇 개의 블록으로 나눠 용골을 올리고 그 위에 블록들을 레고 조립하듯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기존의 건조 방식보다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한 달 안에 한 척이 찍혀나오는 셈으로 최단기간에 건조된 리버티선은 공사를 시작해서 선박 진수까지 5일 걸렸다고 한다.

이 어마무시한 생산력으로 미국은 영국과 소련, 그리고 자국 군대에 필요한 물자수송을 잘할 수 있었으나 그만큼 희생이 컸다.

가장 큰 문제는 비무장 민간 선박이 속도가 느리니 독일 유보트가 수상 항해로 따라잡아서 함포로 격침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급히 만들다 보니 용접 불량으로 선체에 균열이 가고 계류나 항해 도중 갑자기 두 동강 나서 침몰하는 등 심각한 손상을 받은 리버티선의 수가 이백여 척이 넘었다.

반면 철은 고온에는 상당히 강해 방화문 등에 쓰인다.

 

철광석은 소련, 호주, 브라질, 중국 등에 세계 매장량 반 이상이 묻혀있다.

벌크 화물 물동량이 곡물보다 많은 게 철광석으로 대형 광석선이 주로 실어 나른다.

광석을 녹여 철을 빼내 철재를 만드는 공장이 제철소이다.

한국은 진작 포항제철소를 만들어 철강을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큰 역할을 했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화물선은 철강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구조물 중 하나이다.

제철소에서 만든 철강은 선박을 만들기 위해 조선소로 운반된다.

현재 국내에는 세계적인 대형 조선소가 여러 개 있다.

철강으로 만든 선박 설계 수명은 대략 25년 정도이다.

자동차 수명 10년보다 길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에서는 어떻게 잘 고쳐 20년도 넘게 굴러다니기도 하지만...

선박이 낡아 운항할 수 없으면 폐선 처리한다.

인도, 방글라데시 등지에 폐선 처리 조선소가 많다.

 

사람도 낡으면 후진국 자동차처럼 잘 고쳐 평균수명보다 두 배는 오래 굴러다닐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