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슬픈 해당화호와 레이테 해전

부에노(조운엽) 2020. 10. 26. 07:29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레이테섬 해안에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장군은 사진 찍을 때 자기보다 키 큰 참모나 사병은 곁에 있지 못하게 했다

 

 

슬픈 해당화호와 레이테 해전

 

 

음악 : 섬마을 선생님, 이미자 https://www.youtube.com/watch?v=J5ilgnQNS3o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어렸을 때 듣던 '섬마을 선생님'의 구성진 노래에 우리 열아홉 살 청춘이 애달프던 시절이 있었다.

바닷가 모래땅과 산기슭에서 자라는 예쁜 해당화에 슬픈 전설이 있다.

잘 살던 집안에서 갑자기 부모가 돌아가셔서 천애 고아가 된 남매가 있었다.

누나가 원나라에 공녀로 가게 되어 뒤쫓아가던 어린 남동생이 어느 바닷가에 지쳐 쓰러져 죽은 자리에 빨간 해당화가 피어났다.

그 꽃이 애타게 따라가던 동생의 넋이라고 사람들이 기렸다고 한다.

코리아라인은 대형 광석선에 해당화, 군자란 등 꽃 이름을 선명에 붙였다.

서양 문화에서 배는 여성 명사이다.

선박이 여성처럼 화장, 즉 도장을 하는 데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여성 3인칭 대명사인 'She'를 썼었다.

여성처럼 온화하고 어머니처럼 선원들을 보호해 무사히 항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성 명사를 쓴다고도 했다.

 

오래전 해당화호가 필리핀 근해를 지나면서 본사에 정오 위치를 보낸 후 사라진 적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광석 전용선으로 호주 댐피어항에서 철광석을 싣고 포항제철로 가는 중이었다.

결국 배는 통신이 두절되고 29명의 선원과 함께 10만t의 철광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거운 철광석을 운반하는 선박은 파도에 선체가 부러져 조난신호도 못 보내고 순식간에 가라앉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무렵 초대형 태풍 '킴'이 해당화호 항로를 뒤따라왔다고 한다.

선박을 찾기 위해 일본 해상보안청, 필리핀 해양경찰, 수빅만의 미 해군 7함대, 오키나와에 있는 미 공군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선주인 해군 참모총장 출신 이맹기 제독의 인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지나해를 항해 중인 회사 소속선 군자란호에 해당화호와 교신해보라고 지시하고, 서울 무선국에서도 해당화호가 응답 없음을 확인하였다.

철광석을 가득 싣고 출항할 때 만재 흘수선까지 배가 가라앉았고 수면에서 갑판까지는 겨우 5m 남짓했을 것이다.

그 정도면 파도가 조금만 쳐도 갑판 위로 바닷물이 넘나든다.

파도와 함께 밀려온 날치 같은 물고기가 물이 빠진 갑판에서 퍼뜩거리기도 한다.

큰 파도를 정면으로 만나면 브리지에서 선수가 밑으로 휘어지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러다가 긴 배가 쩍하고 부러질 것 같다.

 

호주 북서부에서 한국으로 가는 항로는 반드시 필리핀 레이테만 옆을 지나간다.

레이테만을 지날 때는 대부분 캡틴과 항해사가 긴장한다.

해 질 무렵의 레이테만의 태평양 하늘은 눈물 나게 아름답고 핏빛처럼 빨갛다.

처음 보는 사람은 참 아름다운 노을이라고 감탄하지만, 그곳이 지구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 중 한 곳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이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기를 잡는 계기가 됐다면, 이 년 후 레이테 해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기를 꺾은 역사적 전투였다.

 

1940년대 초 필리핀은 미국의 자치령이었다.

1941년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비겁하게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듬해 필리핀을 공격해 그곳에 주둔하던 미군을 쫓아내고 필리핀을 점령했다.

당시 필리핀 주둔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말을 남기고 호주로 작전상 후퇴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동맹의 기세는 엄청났다.

독일은 영국을 뺀 서유럽을 다 먹었고, 이탈리아는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 쳐들어갔으며, 에스파냐의 프랑코 정권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파시즘 정권을 세웠다.

일본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를 점령하면서 아시아를 장악하였다.

그야말로 세상이 바뀌는 듯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일본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 연달아 지면서 힘을 잃어갔다.

아프리카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밀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이기게 된 결정적인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작전을 성공시킨 것은 목숨을 바쳐 싸운 장병들이었지만, 이들을 총지휘한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리더십도 큰 몫을 했다.

유럽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는 세계적인 명장이 되어 미국 대통령까지 되었다.

맥아더가 참모총장 할 때 참모로 데리고 있던 아이젠하워 장군이 노르망디 작전에 성공하자 맥아더 장군은 레이테 상륙작전에 목을 맸다.

미 해군이 필리핀보다는 일본이 지배하던 대만을 더 공격하고 싶어 했으나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국민들에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필리핀 공격을 강하게 주장했다.

 

태평양전쟁 때 레이테섬 주위에서 일본군과 미군이 네 차례 붙었다.

미일 양측 함대의 총배수량은 약 250만t으로 인류 역사상 제일 큰 해전이었다.

레이테 해전에서 미군은 호위 항모를 포함해 7척이 가라앉았고 일본은 항모, 순양함 등 무려 26척의 전투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의 병사가 물고기밥이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미군 호위 항공모함 탄약고가 폭발하여 가라앉기도 했다.

카미카제의 전설같은 자살 공격은 미군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저런 지독한 국민이 사는 일본이란 나라를 완전히 제압하려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까’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을 쓰기로 한다.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연합군에 정식으로 손 든 뒤에도 필리핀의 한 섬에서 오노다 소위는 항복하지 않고 혼자 밀림 속에 숨어있었다.

무려 30여 년간 밀림 속에서 버티던 소위는 그의 옛 상관이 섬에 가서 '전쟁은 끝났다. 그만 나와라.'라는 말을 듣고서야 밀림을 등져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레이테만은 이렇게 수많은 병사의 원혼이 떠다니는 바다이니 그걸 생각하면 어찌 소름이 끼치지 않겠는가.

레이테 해전이 끝나고도 한동안 물에 퉁퉁 부은 사체가 수도 없이 떠다녔고 상어 떼가 들끓었다고 한다.

그런 슬픈 역사를 지닌 바다 레이테만을 지나가던 해당화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먼저 간 미일 해군 선배들이 심술을 부려서 젊은 마도로스를 데려갔을까?

많은 배가 레이테만을 지날 때 붉은 하늘에서 날아다닐 병사와 선원들의 넋을 위해 바다에 술 한잔 붓고 고수레를 하기도 한다.

 

동남아 다닐 때 같이 배를 타던 갑판수가 몇 년 전에 그 해당화호에 갑판원으로 가기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배가 사라지고 친했던 선원 여럿이 시체도 못 건지고 죽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그리고 동료 선원의 부인 몇이 남편이 죽은 것을 믿지 못하고 반은 매쳤다고 했다.

그 늙수그레한 갑판수는 배가 필리핀 근방을 지나면 항상 째려있고 한밤중에 뭔가에 홀린 듯 혼자 중얼거리며 선미로 걸어 나가는 것을 여러 선원이 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