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그 섬에 가고 싶다
영화 : The battle of Midway https://www.youtube.com/watch?v=h7Z0yUYHgP8
바다 위를 떠다니는 마도로스가 세계의 해전에 관심이 없다면 말이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매일 다니던 바다 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하는 궁금증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해군 함정을 타던 이들이 전역 후 상선으로 많이 갈아탔다.
슬픈 해당화호가 필리핀 레이테섬 옆을 지나가다가 먼저 간 미국, 일본 해군의 원혼이 데려갔다는 이야기는 바다 사람은 선배 선원에게 들어 조금은 안다.
태평양 전쟁에서 진주만이 일본에 선제공격을 받고 미 해군 태평양 함대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박살 났다.
그러나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금방 온 나라 생산 기능이 전시 체제로 돌아가 비행기고 배고 마구 찍어냈다.
그래서 레이테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아작내고 해상 주도권을 잡아 이차대전에서 이기는 길로 갔다.
그 레이테 해전 직전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이 태평양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미 해군이 일본에 처음으로 승기를 잡은 역사적인 해전이었다.
영화로도 몇 편이 나왔다.
미드웨이제도는 아시아와 미국의 태평양 한가운데 있어 이름을 미드웨이라 지었다.
하와이제도의 북서쪽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으로 19세기부터 미국령으로 해군 기지가 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해저 케이블의 중계지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태평양 함대 전력은 일본보다 떨어졌다.
미합중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에 휘둘려갔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대영제국은 독일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 이어 북아프리카와 지중해로 전선이 커지면서 태평양에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전투 중, 독일이 개입하여 롬멜 전차부대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로 잘 싸웠다.
북아프리카가 영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지중해에서도 독일 유보트에 고전했다.
그 와중에 처칠이 전투기 지원 없이 해군을 말레이 해전에 보냈다가 일본 폭격기 공격에 몽땅 가라앉았다.
연합군으로 참전한 호주는 군사력이 허당이었고, 네덜란드는 이미 자기 나라를 나치 독일에 빼앗겨 왕실이 영국으로 피난 가 있어 나라 없는 힘 빠진 군대였다.
그러다 보니 태평양 전쟁 초기에 연합군은 중일전쟁으로 경험이 많은 일본군에게 계속 깨지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큰 피해를 본 미 태평양 함대는 군함이 대부분 부서졌다.
깨지고 가라앉은 전함을 건져 수리했지만,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미국의 생산력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나, 전쟁 초기에 생산라인을 바꿔 실전에 투입하려면 이것 역시 시간이 걸렸다.
또한 전력 손실과 함께 태평양 함대의 사기도 형편없이 떨어졌다.
사실 이것이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한 후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전과이기도 했다.
일본의 원래 목적이 석유와 철강 등 원자재 수출을 막은 미국이 주눅 들어 협상하러 나오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미 태평양 함대가 한 수 아래로 얕잡아보던 쪽발이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태평양 함대 장교들도 이제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옷을 벗어야 할 처지였다.
이때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온 니미츠 대장이 취임사에서 소속 장교들을 자르지 않고 유임하겠다고 발표하여 사기가 엄청나게 올랐다고 한다.
미 태평양함대에는 해군 엘리트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을 대신할 인재를 다시 모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전포고 없이 일요일에 일어난 진주만 공습의 경우 태평양 함대에 모든 책임을 묻기도 뭐 했다.
니미츠 제독의 이름을 딴 지명이 세계 여러 곳에 있고 미드웨이섬에도 니미츠 도로가 있다.
진주만에서 미 태평양 함대에 본때를 보여준 일본에 미 해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전력으로 일본군에 넘어간 마셜 제도, 웨이크섬 등에 공습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효과는 별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본군도 미군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니...
그러나 미군이 손을 안 들고 자꾸 엉기니까 기고만장한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태평양 함대를 아예 박살 내려고 했다.
연합군은 필리핀과 자바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지면서 사실상 무너졌다.
인도차이나의 영국군은 일본군에 항복했고, 마닐라 옆 바탄반도에서 고립된 미군 역시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합군 아시아함대는 없어졌고, 영국군은 인도로, 남은 연합군은 호주로 후퇴했다.
병력도 얼마 안 되고 오갈 데 없었던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가 일본에 점령되자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그나마 네덜란드의 잠수함부대가 영국의 지원으로 종전까지 활약했고, 상선들은 전쟁 내내 연합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도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태평양에서 일본에 맞붙을 나라는 이빨 빠진 호랑이 미국뿐이었다.
이제 일본은 이천 년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이 되었다.
만주에서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괌과 쿠릴열도를 잇는 어마어마한 땅과 바다를 지배하였다.
그래서 석유와 주석, 고무 등 소중한 자원을 날로 먹었다.
이제 먹은 땅이나 잘 지키고 강화협정을 하자는 육군의 의견과 미국과 영국 해군이 빌빌할 때 완전히 작살 내 구걸하듯이 강화하게 만들자는 해군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미드웨이의 해군 기지를 공격하여, 지원 나오는 미 항공모함을 깨버리자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호주와 미국의 보급로를 막는 뉴기니의 모레스비와 북태평양의 알류샨 열도를 공격하자는 육군의 요구에 함대를 보내야 했기에 미드웨이 침공에 해군 전력이 나누어졌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위해 도쿄 폭격을 주장하였다.
항공모함이 일본 가까이 가 육상 폭격기 16대를 띄워 벌건 대낮에 도쿄를 폭격하고 중국으로 날아갔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에 복수하는 것이었고 일본은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일본에서는 '천황이 거주하는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폭격당했다.'는 점에 경악했다.
여기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짜샤, 우리가 봐줘서 일본 왕궁이 무사했던 거야.'라고 한술 더 떴다는 야사가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드웨이를 공격해 미 항공모함을 깨부수기로 작전을 세웠다.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다음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의 정보를 캐내는 낚시 무전을 했는데 방심한 일본군이 낚였다.
일본이 보낸 통신문이 태평양 함대에서 감청되었다.
미군은 이미 일본군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다음 공격 목표가 'AF'란 사실을 알았다.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했을 때 'AF'가 미드웨이라고 예상하였는데 모두의 의견이 같지는 않았다.
이에 도청당할 것이 뻔한 무전으로 '미드웨이에 조수기가 고장 나서 식수가 부족하다.'라는 가라 전보를 보냈다.
일본군은 이틀 뒤에 'AF에 식수가 부족함'이라는 무전이 떴다.
그래서 다음 공격 목표가 미드웨이란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됐다.
이 건은 군 통신보안 교육에도 나올만큼 유명한 일화이다.
얼마나 성공적인 낚시였냐 하면 일본군은 상륙함에 엄청나게 많은 물과 조수기를 싣고 왔다고 한다.
그만큼 다른 군수 물자를 가지고 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당시 미드웨이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최전방 섬이었다.
특히 동태평양에는 이렇다 할 섬이 없기에 미드웨이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바로 하와이였고, 본토 공격을 받을 거점을 내주게 된다.
미군은 방어 준비를 철저히 했다.
미드웨이는 비행장 크기가 섬의 1/4을 차지하는 작은 섬인데 전투기 백여 대가 북적거렸고, 대공포에다 지뢰까지 엄청나게 깔았다.
하지만 준비상황이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미 육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낡은 전투기를 조금만 보냈고 그나마 조종사 대부분이 풋내기였다.
전투기가 얼마나 낡았으면 날개에 반창고를 바르고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연승에 도취해 자만하였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때와 같은 철통 보안은 어디 가고 출전을 앞둔 군함의 승조원들이 미드웨이로 간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일본 제독은 아예 무선으로 모든 지시를 내리고 군함들끼리도 무선 통신으로 미드웨이를 나불댔다.
일찍이 미드웨이 공격을 알고 있던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오히려 일본군이 사기 치는 거 아닌가 헷갈렸다.
어쨌든 이미 미드웨이 기습 작전을 들킨 상황에서 일본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양국의 전력 차는 큰 편인데 어쨌든 미 해군이 일본의 공세를 잘 막았다.
이로써 미국은 시간을 벌어 압도적인 군수품 생산으로 물량 공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 발발 직후,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에서 재미를 보다가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다시는 수적 우세에 서지 못하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의 여파로 일본군은 비행기, 군함과 숙련된 조종사, 정비사를 비롯한 인적, 물적 소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하게 된다.
일본군은 당시 레이더 기술은 있었으나 활용을 못 해 망원경으로 보고 소리를 들어 작전했다.
레이더를 만들어 일본 함대와 폭격기의 위치를 미리 아는 미군과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어불설성이었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과 순양함 1척이 격침되었고 비행기 322대 손실에 3,500여 명이 전사, 실종되었다.
미군 피해는 그보다 적어 항공모함 1척, 구축함 1척이 격침되었으며 항공기 147대 손실에 300여 명이 전사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일본군 고위 장성들은 미군이 겁을 먹었다고 짐작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이 제대로 훈련된 적군과 전쟁을 해본 적이 없어 자만심에 빠진 까닭이다.
당시 일본은 핫바지 주변국들에 승승장구하고 있던 터라 미군도 우습게 알고 있었던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미국이 진주만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미국 내 여론이 반전에서 참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 엄청난 기술력과 물량 보급으로 일본을 몰아붙였다.
게다가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나가고 여성 동무들은 군무원이나 군수물자 공장에서 힘을 보탰다
또 일본 수뇌부의 어이없는 생각은 미드웨이를 점령하고 미국 함대를 모조리 없앤 뒤 북으로는 알류샨 열도, 남으로는 호주까지 먹는다는 구상이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니 전력이 흩어져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일본의 대본영 해군부는 어이없게도 미드웨이 해전의 참혹한 패전을 철저하게 은폐하였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조종사와 승조원은 모조리 연금시키고 부상하지 않은 초급 장교들과 사병들은 아예 남방 전선에 총알받이로 보내 버렸다.
하지만 작전을 만들고 지휘했던 고급 지휘관들은 그 누구도 문책받지 않았다.
만약 미 태평양 함대가 이렇게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면 니미츠 제독과 고급 장교들은 청문회에 군사재판까지 받았을지도 모른다.
일본 육군 또한, 정부의 고위 관료들 대부분도 모를 정도로 그 은폐 공작은 철저했으니 일반 국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 공격에 한쪽 다리를 잃었던 일본의 최고위 외교관도 미드웨이에서 패전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소식을 듣고 충격받았다고 한다.
이런 은폐 공작은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일본 군인들과 관료, 국민들 대부분이 자기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필리핀과 사이판을 빼앗기고 거기에서 뜬 B-29 폭격기들이 본토를 때리기 시작할 때 알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뒤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가고, 일본은 망하는 길로 들어섰다.
미드웨이섬은 아주 작아 인구가 이천여 명밖에 안 되고 화물이 별로 없어 큰 화물선이 들어갈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드넓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그 섬에 더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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