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미소
필리핀의 한국인 우상
한국에서 비료를 싣고 마닐라 남쪽의 작은 항구 산 페드로에 갔다.
항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작은 곳이었다.
큰 배는 못 들어오고 동남아 원목선같이 작은 배 한두 척 겨우 댈 수 있는 부두이다.
심심하면 배 앞의 노점에서 갈색 병맥주, 산 미겔과 다디단 망고를 먹으며 동네 아가씨와 농담 따먹기 하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배 타니 이런 먼 나라 깡촌에도 오고 예쁜 외국 아가씨와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 정말 배 잘 탔다는 생각을 혼자 많이 했다.
어느 날 대리점 차 타고 멀지 않은 마닐라에 나갔다.
혼자 후덥지근한 시내 구경하다가 리잘 파크까지 갔다.
필리핀 독립 영웅 호세 리잘을 기리기 위해 그가 총살된 곳에 유골을 안치하고 기념비를 세운 곳이다.
농구 골대가 있는 곳에서 젊은이들이 신나게 농구를 하는 걸 잠시 서서 구경했다.
한 젊은이가 다가와 웃으면서 '하이! 두 유 노우 신동파?'라고 묻는다.
아니, 누굴 말하는 거야...
필리핀에는 오래된 한국인 우상이 한 명 있다.
수도 마닐라에는 '신동파 빵집', '신동파 양복점' 등 그들의 영웅 이름을 붙인 상점들이 있을 만큼 전 국민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이름은 필리핀 현지에서 '행운과 복, 만사형통' 같은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1969년 방콕에서 아시아 농구 선수권대회 결승전이 벌어졌다.
당시 아시아 농구 최강인 필리핀을 상대로 신동파 선수 혼자 무려 50점을 넣는 대활약을 해서 필리핀 국민을 놀라게 했다.
결승전 당시 한국은 방콕 현지에서 라디오 중계를 했는데, 필리핀은 TV로 생중계를 했다.
대회 직후 필리핀에서는 그 경기를 한 달 내내 재방송했다고 한다.
그만큼 농구를 좋아하고 신동파 선수가 전국구 스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필리핀에서 신동파 선수의 인기는 대단해서 한국 사람을 보면 '신동파를 안다.'고 자랑하는 게 인사일 정도였다.
신동파가 필리핀에 가면 공항 입국 수속부터 프리 패스에 로비가 난리 난다고 한다.
공항 경찰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진땀을 뺀다.
경기장에 나타나면 그를 보러 구름같이 몰려온 관중이 기립 박수로 맞이하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은퇴한 지금 한국 팀 임원으로 필리핀에 가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은퇴하고 40여 년이 흘렀는데도 필리핀인들의 머리에는 신동파가 우상으로 살아있는 모양이다.
20대 젊은 필리핀 기자에게 신동파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들었고, 또 매스컴에 자주 나와서 잘 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루손섬에 처음 온 스페인 사람 비얄로보스는 당시 스페인 황태자였던 펠리페 2세 이름을 따 Felipinas라고 섬 이름을 지었다.
필리핀 현지어인 타갈로그어에는 F 발음이 없어 Pilipinas가 되어 필리핀 일대의 섬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됐다.
필리핀은 칠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며, 인구가 일억이 넘는다.
대부분 섬이 불의 고리라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있어 지진이나 화산 활동이 자주 일어난다.
게다가 태풍이 거쳐 가는 지역이라 자연재해가 자주 생긴다.
역시 자연재해 종합 백화점인 나라이다.
유럽인의 필리핀 정복 이전에는 인도, 중국, 아랍화 된 원주민 왕국들이 있었다.
주요 문명권들이 필리핀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다양성은 필리핀 사회에 빛과 어둠으로 작용하였다.
섬 사이에 교류가 빈번했으나 원주민 간의 결속력은 별로 없었다.
공통으로 믿는 종교가 없어 중앙집권체제의 강력한 나라가 나오지 않고 고만고만한 작은 왕국들이 티격태격 싸웠다.
이런 기질로 필리핀 사람들은 단합이 잘 안 된다.
남부 지역에는 아랍인이 정착하면서 이슬람교가 들어오고 술탄 왕국이 생겼다.
한때 보르네오, 팔라완과 민다나오까지 영토가 커졌고 해상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이슬람 도시 왕국이 마닐라까지 생길 정도로 그런 이슬람화 추세가 계속 이어졌다면 필리핀 역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함께 이슬람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필리핀은 삼백여 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지자 지배자가 미국으로 바뀌었다.
미군은 저항하는 필리핀 민간인들을 함포 사격으로 학살하는 등 60여만 명을 죽였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필리핀에 들어와 미군을 몰아내고 괴뢰 정부를 세웠다.
필리핀 사람들은 일제와 괴뢰정부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전쟁 도중 100여만 명의 필리핀인이 죽었다.
그래서 필리핀에서는 반일 감정이 컸고 필리핀인 스스로가 미국인도, 스페인 사람도 아닌 필리피노임을 자각하는 정체성이 생겼다.
일본이 망하고 미군이 다시 들어와 필리핀은 미국의 승인 아래 독립하여 4세기 동안의 외세 지배가 끝나고 필리핀 전 지역을 포함해 그들만의 첫 나라를 세웠다.
일제에 투쟁했던 필리핀의 공산주의 세력은 이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고 하며, 토지개혁 등을 요구하였다.
반미 무장투쟁을 하며 까불다가 항일 게릴라 투쟁을 했던 막사이사이 대통령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마르코스 대통령이 들어서 친미 반공이었던 필리핀이 소련 등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했다.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도 호황을 누려 사회 문제들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그 때문에 대선에서 압승을 해 재선 대통령이 되었으나 야당인사와 민다나오섬의 무슬림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마르코스가 14년간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과 고문 정치에 경제도 아작났다.
또 부인 이멜다와 장남 등 친인척들에게 정부 요직을 맡기고 개인재산 수억 달러를 국외로 빼돌렸다.
경제도 족벌독점체제로 정체되면서 한때 아시아에서 홍콩 다음으로 잘살던 나라가 국민소득이 줄고 외채도 엄청나게 늘었다.
그의 정적 아키노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는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하여 반마르코스 여론이 거세지면서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러 정권을 연장할 생각이었는데 부정선거를 해 전국에서 노란 머리띠를 두르고 반마르코스 투쟁을 벌이자 위기를 느끼고 가족들과 하와이로 토꼈다.
독재자 마르코스가 망명한 후 아키노의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민주화가 되었다.
반정부 인사들을 대거 사면하고 임기를 6년 단임제로 하였으며 지방분권도 추진하였다.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았다.
민다나오섬을 비롯한 남부 지방은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하여 지금도 분리 독립하겠다고 난리다.
여기에 극심한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공산주의 반군까지 들고일어나 골치 아픈 나라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재판 없이 총살해 이 또한 인권 문제가 되고 있다.
두테르테가 부패한 공무원은 총으로 쏴도 된다고 말했다.
다만 죽으면 살인죄가 되니 발을 맞추라고 했다.
부패 공무원을 쏜 사람은 기소되지 않고 교도소에 잡아넣지도 않겠다고 했다.
그의 강경 발언은 필리핀 공직사회의 부패상이 도를 넘었다는 판단에서였다.
악명 높은 필리핀의 치안과 부패를 개선해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인지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다.
두테르테는 '한국과 중국 관광객들의 돈을 뺏지 말라. 만약 빼앗으면 남부 IS가 득실거리는 오지로 유배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미국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필리핀의 무차별적인 마약범죄자 처단에 대해 말하자 '인권보다 마약 범죄 소탕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에게 대놓고 'Son of bitch!'라고 쌍욕을 하여 정상회담이 취소된 적도 있다.
또 반기문 총장의 조언에 불편한지 'Shut up!' 하고 막말하는 인간이다.
코로나 봉쇄에 정부의 지시를 따르라며 위반하거나 의료종사자들을 해치면 사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지도자이시다.
두테르테 성님도 정말 만만치 않네.
온산에서 고급 휘발유를 싣고 바탄가스항에 풀어주러 간 적이 있다.
석유화학제품 단지에 배를 대니 민가도 없고 가까이 나갈 데가 없었다.
하루는 캡틴, 기관장과 사관 몇이 바람 쐬러 부두 앞 숲길을 산책했다.
가다 보니 바다가 확 트인 곳에 현지 식당 하나가 달랑 보였다.
앉아 쉴 겸 거기에서 새우, 게, 조개와 해물볶음밥 등을 시켜서 맥주를 마셨다.
국제 마도로스들이 걸게 먹다 보니 거기 있는 해산물과 맥주가 동이 났다.
모두 기분 좋게 먹고 계산하니...
헐~ 백 불도 안 된다.
아마 시내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먹었다면 기백 불은 나왔으리라.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항구가 되었다.
필리핀은 한국전쟁 때 지상군을 보내 한국을 지원했다.
참전 중에 전사자 112명과 350명이 넘는 부상, 실종자가 생겼다.
이 또한 잊지는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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