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 아가씨들
섬 이야기 네 번째, 비키니섬
아름답다고 소문난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 앞에 있는 다이아몬드 록이라는 조그만 바위섬은 실제로 군함으로 명명된 적이 있다.
작은 바위섬이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해서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 해군은 다섯 문의 해안포를 섬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HMS 다이아몬드 록' 함이라는 이름으로 대영제국 해군 함적에 이름을 올렸다.
승조원은 약 백여 명 정도였다.
이후 나폴레옹 해군에 의해 나포되었다.
당시 다이아몬드 록 함은 대규모의 프랑스 함대에 맞서 치열한 포격전에서 섬을 잘 지켰다.
프랑스 해병대는 50여 명의 손실을 보며 섬에 상륙은 했지만, 영국 해군이 사다리와 줄을 치우자 바위 절벽을 오를 방법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탄약이 바닥나고 물이 떨어지자 영국 함장은 항복하고 섬을 넘겨주었다.
프랑스 해군은 이들 전쟁 포로를 가까운 영국령인 바베이도스섬에 풀어주었다.
프랑스 해군은 섬을 장악한 뒤에 대포를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지금도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 보면 그때 바다에 잠긴 대포가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 해군은 지금도 이 섬을 지날 때마다 군함에 대한 예의를 갖춰 경례한단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하시마라는 섬이 있다.
생긴 것 때문에 군함섬이라고 불렸다.
섬 자체가 작고 섬 위의 건물이 군함 구조물을 연상케 하는 데다 연기를 내뿜는 굴뚝까지 솟아 있으니 얼핏 보면 군함이라 착각할 만하다.
1960년대까지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주민들이 떠나서 지금은 무인도가 되어 관광객에게 일부 개방할 뿐이다.
이 섬은 우여곡절 끝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석탄을 캤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식민지 주민들과 전쟁 포로들이 군함도에 강제로 끌려왔다.
그중 조선인은 오륙백 명 정도였으며, 제 발로 돈 벌러 온 조선인 노동자가 80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들은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문이라고 불렀으며 섬 자체도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게다가 이들이 받은 대우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였다.
파도가 들이치는 바닷가 집에 강제로 살게 했는가 하면 햇빛도 안 들어오는 아파트 지하층에서 살게 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게다가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 오밀조밀 몰려있는 건축물들은 홍콩의 마굴인 구룡성채 저리 가라할 정도였다.
군함도 막장은 매우 위험한 환경이었다.
갱도는 끊임없이 무너지고 가스와 물이 새는 사고가 계속 터져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생계가 막막한 가장들이 자진해서 이곳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당시 하시마섬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다른 업종에 비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게다가 군함도에서는 돈을 쓸 곳이 없어 일만 하면서 피 팔아 번 거 같은 돈을 가족에게 송금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전쟁 중기 젊은 일본인이 징집되어 광부가 부족해지자 조선인을 비롯한 식민지 사람들을 징용해왔다.
일본인 감독은 이들을 짐승처럼 다루었다는데 몸이 아파 일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릎 꿇려 앉혀 놓고 가죽 혁대로 후려치는 등 처참한 대우였다.
전쟁 말기에는 조선인들마저 징집으로 전쟁터에 차출되자 전쟁포로를 끌고 왔다.
이들은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하게 했다.
계속 파고 내려간 갱도는 지하 1,000m에 달했으며 그마저도 좁아터져서 기어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이곳 지하에 매장된 석탄은 품질이 꽤 좋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마냥 지하로 파고 들어갔다.
초기에는 광부들이 8시간 3교대 근무제였다.
전쟁이 본격화되고 미국과의 전쟁이 치열해지자 군수공장을 돌릴 석탄이 부족해져 12시간 이상을 노역했고 심할 때는 16시간 이상씩 일을 시켰다.
더군다나 나이 어린 소년을 개미굴이란 갱내 좁고 깊은 곳에 들어가게 해 16시간 이상씩 작업하게 했다.
군함도에서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따위는 없었다.
낡은 가마니 짝같은 거로 덮어 거룻배에 싣고 가 나카시마섬에서 기름을 부어 대충 태웠다.
전쟁 말기에는 온종일 검은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고 한다.
군함섬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냐만, 발각되면 총살을 당하거나 험한 파도에 휩쓸려 물고기밥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 1945년 8월 9일 항상 어둠침침했던 동네가 갑자기 환해졌다.
미군기가 날아가는 소리나 사이렌도 없었고 폭음도 없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감독과 관리직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탄광 입구는 폐쇄되었다.
잇따라 일본인 광부들까지 없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전쟁이 끝났다.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모두가 곧바로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은 아니고, 일부는 나가사키 복구 작업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원자폭탄으로 방사능이 넘쳐나는 곳에서 잔해와 시체를 치우는 일을 하였다.
강제 노역의 대가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다 까고 그들에게 쥐어진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쪽발이들은 마지막까지도 인간성을 상실한 악랄한 종족이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개별적으로 섬에서 나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태평양 한가운데 마셜 제도의 섬 중에 비키니섬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미국은 이 지역의 원주민을 이주시킨 뒤 이십 년 넘게 핵실험 장소로 사용했다.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도 이곳에서 했으며 총 60여 회의 핵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섬에서 쫓겨난 원주민은 1970년대에 돌아왔지만, 방사능 때문에 살 수가 없어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키니는 50년대 유럽에서 처음 선을 보이고 곧 전 세계에서 유행하였다.
이름은 핵실험을 한 태평양의 비키니 환초에서 유래하였다는데, 당시 비키니를 입는 여성들의 충격적인 탈의 본능을 원폭 실험에 비유한 모양이다.
지금 비키니섬에 가면 비키니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널려있을까?
'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 이야기 여섯 번째, 빨간 머리 아일랜드 여인 (0) | 2020.11.24 |
---|---|
섬 이야기 다섯 번째, 사이판과 괌 (0) | 2020.11.20 |
섬 이야기 세 번째, 독도의 불타는 얼음 (0) | 2020.11.16 |
섬 이야기 두 번째, 천 섬 (0) | 2020.11.13 |
한국인과 거의 비슷하게 보이는 그린란드 여인 (0) | 2020.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