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flower'라는 오키나와 여인의 사진집을 펴낸 오키나와 출신 사진작가 이시카와 마오의 작품 중 하나
그녀는 평생을 '나는 일본인이 아니다, 나는 오키나완이다.'라고 오키나와 인의 정체성을 맹렬하게 주장했다
유황도 전투와 오키나와 여인
더반항을 출항한 해피 라틴호의 긴 항해가 끝판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 아래를 지나고 있다.
이제 750해리 정도만 더 가면 목적지인 고베항에 도착한다.
15노트 속력으로 이틀 남짓 가면 된다.
멀리 오키나와섬 남쪽에 5초마다 한 번씩 번쩍이는 키안 등대 불빛이 보인다.
고국이 가까운 밤바다에서 맥주라도 한잔 걸치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남희의 긴 생머리와 덧니를 가리던 하얀 손, 봉긋한 가슴에 안고 있던 두꺼운 교재, 엑스 자 젓가락질, ‘아이고 배 아파라.’라고 까르르대던 그녀와 함께했던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내 청춘...
배에서 첫 연가를 갔을 때 남희가 지 바쁘다고 소개해준 선미 아가씨까지 생각난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기만 하면 바로 제주도인데...
예전에 고모, 삼촌들이 신혼여행을 바다 건너 제주도로 가면 아주 훌륭했다.
대부분 경주나 온양온천, 설악산 등지로 갔다.
당시 제주로 가려면 비싼 비행기를 타거나 작은 화객선을 타고 밤새 멀미하며 가야 했다.
그렇게 제주에 가면 낯설고 물설어 배탈이 나기도 한다.
문제는 민박 쪽인데 측간에 가면 돼지가 밑에서 입 벌리고 식사할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설사라도 하면 이 똥돼지가 몸을 털어 엉덩이와 옷에 튄다.
그런데 이 작은 제주 돼지가 쫄깃하며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런 똥돼지가 좀 크긴 해도 오키나와에도 있었다.
이슬람권에서 돼지는 음식 찌꺼기를 먹고 기생충을 옮기며 식중독을 일으키는 더러운 동물로 여겨 먹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돼지는 영리한 동물 중 하나로 깨끗한 곳을 좋아하고 방목하면 물찬 제비처럼 잽싸게 뛰어다닌다.
기원전 200년 한나라 때 기르던 작은 돼지 종은 집에 같이 살면서 먹고 남은 음식물과 배설물까지 싹 먹어 청소했다.
또 새끼를 많이 나아 식구들에게 단백질을 제공해주었다.
중국에서 돼지는 버릴 거 하나 없이 부위별로 싹 요리해 먹었고 배설물은 거름으로 쓴 최고의 생산성을 갖춘 가축이었다.
오죽했으면 마오쩌둥 주석이 돼지를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비료공장’이라고 말할 정도였겠는가.
일본 최남단의 섬,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고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4세기 명나라 때 돼지가 들어오면서 오키나와에서 가장 많이 먹는 육류가 되었다.
오키나와는 19세기까지 중국이나 일본에 공물을 바치며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자기네 말이 따로 있고 키가 작으며 피부가 약간 검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에 일본이 무력 점령해버렸다.
1945년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이 전투식량으로 먹던 스팸도 오키나와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 똥을 돼지가 받아먹는 중국식 뒷간이 금지되었다.
19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성행하던 ‘공장식 돼지 농장’은 저비용으로 대량 생산과 고기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돼지는 출하하기까지 5~ 6개월 동안 좁은 공간에서 키워 병이 잘 걸리고 항생제를 많이 먹여야 했다.
요즘 덴마크를 중심으로 유럽 국가들이 돼지에게 더 넓은 공간을 제공해 환기와 위생을 좋게 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동물 복지로 더 건강한 돼지를 키우고 있다.
도살할 때도 윤리적으로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단다.
생산성을 따지는 공장식 농장보다 어차피 사람이 먹을 거 스트레스와 항생제 없이 키우는 돼지가 더 낫지 않을까?
이오지마는 도쿄에서 정남 쪽으로 약 1,200km 떨어져 있는 작은 화산섬이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이 사이판을 점령하자 일본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한다.
일본 본토 바로 앞의 기지인 데다, 인근을 지나가는 미군 폭격기를 요격하거나 본토에 알려줄 수도 있었다.
또한 미군은 본토 폭격을 위한 중간 기착지로 이 섬이 필요했다.
결국 이러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이오지마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활화산이 있고 곳곳에서 가스가 나와 섬 전체에 유황 냄새가 심해 유황도라고도 한다.
태평양전쟁 때 이 섬은 유황과 화약 냄새 그리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한 진짜 지옥이 되었다.
일본군은 최대한 오래 방어를 해 미군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며 본토에 시간을 벌어 주어 미국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하는 작전을 생각했다.
그래서 전멸을 앞당기는 옥쇄 돌격을 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서 집요하게 전투를 하게 했다.
미군은 무려 아홉 달 동안이나 이오지마에 비행기로 폭격하고 함포로 포격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보다 미군의 인명 피해가 컸다.
10일이면 작은 이오섬을 점령하는 데 충분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한 달간의 치열한 전투를 해 약 삼만여 명의 미군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군도 이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되었다.
징용으로 끌려와 비행장 등 섬 내 군사 시설을 만들던 천여 명의 불쌍한 조선인 군무원과 위안부들도 대부분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점령하여 공군기지로 사용하다가 1968년 일본에 돌려주었다.
하지만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해상자위대 항공기지만 있을 뿐 원주민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전투 당시의 불발탄과 유해가 아직 섬 곳곳에 남아 있는 데다 섬을 덮고 있는 흙에 철 성분이 많아 지뢰탐지기 같은 거로 찾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오지마 전투를 쓴 '아버지의 깃발' 서문에서 정부가 허락한 방문객 말고 일반인은 출입이 안 된다고 나온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영토 내에서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 마지막으로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에 일본인이 큰 충격을 받았다.
뉴스에는 일본군이 늘 이긴다고 선전하더니만 바로 코앞에서 미군과 전투가 벌어지다니 놀랄 만도 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십여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일본 또한 군인과 그곳 주민 20여만 명이 넘게 죽거나 다친 비극이 일어났다.
미군은 50만 명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오키나와 상륙 한 달 전부터 3만여 발의 포탄을 쏘아댔다.
미군이 섬에 상륙한 후 처음 며칠 동안은 전선이 조용했으나 일본군의 동굴 진지 앞에서 미군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미군은 수류탄과 화염 방사기로 동굴 진지를 하나하나 제압하면서 전진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일본군은 미군이 방어선을 뚫으면 다음 진지로 후퇴하면서 싸웠다.
격렬한 전투 끝에 미군이 류큐 왕국의 수도였던 슈리성을 장악했고 일본군은 병력의 반을 잃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섬 남쪽 높은 곳에 있는 동굴로 퇴각했고 교전 끝에 대부분 전사했으며 남은 병력은 할복이나 자살하면서 전투가 끝났다.
이 전투 내내 수많은 무고한 오키나와 주민이 죽었다.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을 총동원하여 웬만한 남성은 죄다 징집했고, 남학생들은 데려다 총알받이로 써먹었다.
치마 두른 이는 어린 여학생까지 간호 요원이나 심지어 위안부로 끌려갔다.
일본군은 류큐어 사용자나 미군의 삐라를 주운 주민들을 스파이라고 죽이고 강간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나고 살아난 일본군들 중에는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린치를 당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
전후 미군의 직할 통치를 받다가 1972년 미군 기지는 내비두고 일본에 돌려주었는데 지금도 오키나와 인들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반감이 크며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 함락 여파는 엄청났다.
일본 정부와 대본영이 받은 충격은 사이판 전투 때보다 훨씬 컸다.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를 침공하기 위한 거점으로 너무 작았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함락으로 미군은 일본 본토 공격에 훨씬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이오지마에 이어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가미카제, 반자이 돌격 등 죽자고 덤비는 일본군에 진저리를 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에 망설이게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 도중 유럽 전선에서 독일이 항복했다.
하지만 오키나와 전선의 미군은 독종 일본군과 처절한 혈전을 하고 있었고 전투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일본에 참전을 강력히 요청하는 한편 일본에 원자탄으로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몇 개밖에 없는 원자탄을 터트려도 과연 1억 총 옥쇄를 부르짖는 일본이 항복할까 하는 고위층의 우려도 많았다.
배 탈 때 수없이 지나치기만 한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아름다운 섬 오키나와.
언제나 한 번 상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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