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하늘한 대만 여인
음악 : 첨밀밀, 등려군 https://www.youtube.com/watch?v=axfdk2JtEPg
완도 밑에 노화도인지 어느 한 섬에서 옥돌 원석을 싣고 대만 기륭과 수아오항에 풀어준 적이 있다.
돌 무게가 나가니 선창을 다 채우지 않았어도 배가 폭 가라앉는다.
혼자 생각에 별걸 다 팔아먹는다 싶었다.
외항선이 한국에 들어가면 선원들은 정신이 없다.
짧은 기항 중에 당직 서야지, 가족들 만나야지, 아이들 학교나 집안 사정 때문에 못 오게 되면 애달프게 공중전화 붙잡고 산다.
마나님과 통화하다가 애들 하나하나 바꾸고 처제, 장모님 와 계시면 목소리라도 듣겠다고 서로 난리다.
견우와 직녀, 이산 가족이 따로 없다.
그래서 선원 부부는 만년 신혼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게 배 타면서 대만과 인연이 되었다.
사상이 다른 공산 진영과 적대하는 같은 자유 진영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대만에 친근감이 있었다.
배에서 일과 끝나고 마작이나 훌라, 고스톱을 칠 때 점수 계산을 버벅대면 선원들 입에 붙은 말이 '대만 상고 나왔나, 와 그리 계산이 늦노?'라고 핀잔한다.
대만 상고 대신 마산 상고라고도 말한다.
어찌 된 연유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더 알아볼 일이다.
대만이 고립된 나라라서 대만 달러 환율이 저평가되어 외국인이 느끼는 물가는 아주 싼 편이다.
저녁이면 상륙을 나가 노천 포차에서 하늘하늘 길 가는 아리따운 대만 여인을 구경하며 맛있는 꼬치구이에 대만 피주나 호골주 같은 빼주를 마시고 푼돈 내고 나왔다.
그 당시에는 날씬한 대만 여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니 비쩍 말랐다고 할까.
이 또한 외항선을 타니 누리는 재미려니...
대만의 공식 이름은 중화민국으로 헌법상의 영토는 중국 내륙을 포함하나, 실제 영토는 타이완섬과 진먼, 난사군도 등만 남았다.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1949년까지 내륙 일부를 제외한 중국을 통치했으나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에 밀려 타이베이로 정부를 옮겼다.
타이완섬은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청나라 시대인 약 400여 년 전부터 중국 한족이 들어왔다.
청일전쟁 이후 50여 년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그 후 중화민국 영토가 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산당이 반란으로 세운 불법 단체로 간주하여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화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타이완을 자국의 일개 성으로 간주하여 대만과 친한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대만과는 단교하고 압도적으로 국력이 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UN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UN 가입 후 대만이 UN 상임이사국 자리에서 밀려났다.
아울러 UN에서 강제로 쫓겨나기 전에 자진 탈퇴한 중화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성 타이완이라 말한다.
올림픽 같은 스포츠에서는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로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중화민국은 1948년 대한민국과 처음으로 수교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정부의 새로운 북방정책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외교 관계가 끝났다.
유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가고 중화민국이 나간 것은 월남 패망과 함께 우리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북한의 동맹국인 중공이 유엔에 가입했으니 정전협정이 무효가 되고 적화통일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은 대만과 수교나 단교를 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는 1948년 당시의 중국인 중화민국과 수교를 했고, 이듬해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베이로 옮겨간 후 그 외교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1992년 한중 수교로 주중대사관이 타이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겨 간 셈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중화민국과 단교하여 대한민국은 당시 대만에 있어 최후의 보루였다.
중화민국 외교관이 외교부장으로 가는 길목이 바로 주한대사였다고 한다.
1988년에 우리 정부가 북방정책으로 공산권인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한 데 이어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하였다.
한소가 수교하자 대만 내에서도 한중 수교는 시간 문제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1990년을 전후하여 중국산 농산물이나 제품들이 국내 시장에 들어왔고 중국에서도 한국제 상품이 팔렸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연방이 새로 생기면서 마침내 중국과 수교하였다.
대만 내 여론이 난리 났다.
당시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들이 눈물로 대만 대사를 배웅했으며, 일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한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국이 중화민국 수교국 중 최후의 큰 나라였기에 마지막 기대가 무너지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한편으로는 '속국 주제에 종주국을 배반하다니!'라는 봉건적인 중화사상도 깔려 있다는 말도 있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양국 대사관이 떠나고 대신 대표부가 남았다.
타이완섬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지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은 이곳을 일본과 동남아, 인도,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 중계지로 이용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대만과 조선에서 군수품과 경공업 제품을 만들었다.
일제 패망 후 국공내전에서 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나면서 내륙의 많은 기업이 같이 오게 되었다.
이때 중국 본토에서 가져온 달러와 금이 엄청나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될 자본금이나 물적 인프라는 많았다.
이러한 물적, 인적 자원에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으로 겁을 먹은 미국이 대만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해주어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반면 내륙은 군벌 간의 내전, 중일전쟁, 국공내전으로 전국이 황폐해졌다.
공산정권 수립 이후에도 문화혁명 등으로 사실상 국가가 마비되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데 근 반세기가 걸렸다.
한반도의 경우도 6.25 전쟁이 터져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8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첨단 공업 분야의 투자가 대만으로 많이 들어왔다.
노트북과 넷북의 전 세계 생산량의 80% 이상이 대만에서 생산되고 인터넷 통신장비는 90% 이상이 대만산이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시가총액은 400조 원을 넘었고 이는 삼성전자를 훨씬 앞선 것이다.
IMF 사태로 실직자가 된 한국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우트해서 관련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 세계에 엄청난 PC 부품을 삼성의 반 가격에 수출한다.
세계에서 메인보드를 비롯한 각종 주요 부품을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있어서인지 IT 부문의 국가경쟁력은 미국에 이어 부동의 2위라고 한다.
그래서 대만은 한국,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되었다.
대만 경제 구조는 하청산업이 중심이 되어 제품을 만들어서 상표를 원청업체 것으로 붙여 파는 ODM이 주류이다.
IMF 기준으로 1983년에 대만이 선진국으로 분류되었다.
개발도상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으로 넘어간 처음 사례이다.
이미 1970년대에 컬러TV가 일상화되었고 자가용 보급도 한국보다 훨씬 앞서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오일쇼크 이후로 매년 안정적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해 보유한 외환이 너무 많아 걱정할 정도였다.
대만의 외환과 금 보유고는 세계 최상위권이다.
이는 대만의 국가나 경제 규모에 비하면 대단한 수준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이라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터지고 글로벌 금융위기에, 달러가 넘치는 대만이 금을 많이 샀는데 뒤따라 세계의 금값이 폭등하였다.
금값이 오른 뒤에 금을 다시 팔아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그래서 대만의 보유 외환이 세계 3위까지 올라갔다.
이러한 대만 정부에 세계의 비난이 쏟아졌고 그래서 보관할 데도 부족한 금 따위는 앞으로 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도 한 번 그랬으면 좋겠네.
대만의 대부분 기업이 하청으로 유지하기에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 절감과 인력감축이 우선순위다.
그래서 임금 수준이 아주 낮고 중국과의 이념 대립 때문에 노동자의 목소리가 크지 않고 노조가 활성화되지 않은 나라이다.
이렇게 대만의 임금수준이 낮고 대만의 화폐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으나, 개인 순자산이 많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생활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나쁘지 않다고 한다.
높은 부동산 가격도 큰 문제로 타이베이의 아파트 가격은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다.
거기에 주차장은 따로 사야 하는데 주차장 부지 가격도 억 단위로 매우 비싸다.
일반적인 소득이 한국의 절반 정도이니 순수한 소득으로 집 사기가 우리나라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이야기다.
다만 대만인의 자가 주택 보유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대만에서는 부모들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삶의 중요한 목표로 여긴다.
그래서 교육열이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높고, 아직도 학생들이 잠 못 자는 치열한 고교, 대학 입시와 야자가 있다고 한다.
대만도 사교육이 많아 사교육 시장이 크고, 주입식 교육이 문제라고 한다.
대만과 문화교류는 어느 정도 활발하며 클론이 엄청나게 뜬 적이 있었고, 한국 드라마가 꽤 인기가 있단다.
지금도 대만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 노래를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요즘 미세먼지, 중국 어선의 서해 불법 조업, 사드 보복 등으로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커지고, 대만에 대한 인식이 이전에 비해서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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