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be port tower in night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음악 : 돌아와요 부산항에, 조용필 https://www.youtube.com/watch?v=J-Vnojc9-4s
해피 라틴호가 긴 항해 끝에 오사카만에 들어서니 우현 쪽 간사이 공항에 비행기가 수시로 뜨고 내리는 것이 보인다.
거리의 불빛이 너무 곱다는 불루 라이토 요코하마.
바다에서 보는 고베 포트 타워와 해양 박물관의 야경도 요코하마 못지 않게 아름답다.
일본에 오니 바다 냄새도 다른 것 같다.
바다내음에 상큼한 미깡 향기가 섞인 건 아닌지...
영국과 아일랜드, 이란과 이라크처럼 이웃 나라가 불편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은 거 같다.
역사적으로 서로 영토나 종교 분쟁으로 감정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흔히 일본을 우리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그 말속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문화를 섬나라 일본에 다시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일본에 논어 등 학문을 전해준 백제 왕인 박사는 또, 황태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를 가르치고 종이, 먹 등의 제조법을 전해주었다.
그가 일본 호류사에 그린 '금당벽화'는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 사람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다.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한일고대사에 대해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인정하였다.
이렇게 일본과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문화와 인적 교류를 하고 있었다.
반면 임진왜란 전후로 왜구들이 우리나라에 침입해 애먼 백성을 죽이고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우리나라는 20세기 초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참상을 겪었다.
그때 우리나라의 독립투사, 지식인뿐만 아니라 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탄압과 학살되었다.
원수가 따로 없다.
분명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었다.
그리고 밉지만, 일본과의 협력관계도 생각해야 우리나라가 더 나아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을 거치면서 일본을 부지런히 배웠다.
이제는 일본을 거세게 추격해서 앞서 나가는 부분도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아마 일본은 우리와 거리만큼이나 가깝고 안드로메다 별자리처럼 영원히 먼 나라일 수도 있겠다.
해피 라틴호의 지도와 거울인 1갑원과 또래라서 가깝게 지내다 보니 상륙을 같이 나갔다.
시내 구경하다 파친코로 손 좀 풀고, 서서 마시는 다치노미에서 오사케를 한 잔씩 시켜놓고 목을 축였다.
파친코에서 엔화를 벌었으면 안주가 푸짐하겠으나 대부분 전기세를 보태주고 나와 간단히 마신다.
배 타고 일본에 오면 아직도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대체로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
다치노미는 우리나라 포장마차 비슷하게 여러 가지 안주가 올망졸망하게 있고 양을 적게 해서 싸게 판다.
어떤 일본인은 오사케 한 모금하고 한 점에 300엔 하는 마구로를 눈 감고 조금씩 베어 먹으며 '오~이시데쓰네~' 하며 감동해서 몸을 부르르 떤다.
파는 것이나 먹는 것에서도 적은 것에 만족하는 축소 지향적이라는 일본인을 느낄 수 있다.
유전자 검사를 하니 일본인들과 한국인이 아주 가까운 민족으로 밝혀졌다는데 비슷하다는 거지 똑같다는 건 아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초 어휘는 아예 다르니 같은 조상 운운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골격은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커서 일본인이 왜소하게 보인다.
일본인들은 치열이 고르지 못하거나 덧니가 난 사람이 많으나 그것도 젊으니 예쁘다고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남희가 일본에서 살았으면 덧니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적었을 것이다.
일본인은 남이든 나에게 민폐를 주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늘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내색하지 않는다.
일본인은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기에 그런 도라이는 조직에서 아예 왕따시킨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본인은 예의 바르다고 느껴진다.
외국인이 보기엔 친절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또는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으로 비친다.
반대로 일본에 관광 온 외국인이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떠든다든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다니면 사람 취급을 안 한다.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는 별것도 아닌 일에 경찰차가 오기도 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되면 강제 추방당해 다시는 일본에 발을 못 디디게 한단다.
어제까지 죽창을 들고 죽자 살자 덤비던 일본인이 미군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오히려 불안했다는 여러 서양 사람 이야기처럼 꽤 이해가 되지 않는 국민성이다.
그런 게 몸에 밴 일본인들은 거절도 딱 잘라 말하지 않고 두리뭉실 넘어가기에 오해할 소지가 많다.
한 예로 일본 기업과 상담할 때 '하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대답에 거의 다 된 줄 알았다가 벙 찌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뭐 살 때 마음에 안 들면 '둘러보고 다시 올게요.' 하고 갔는데 손님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극히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과 한반도의 국가들에 일본인들의 침략은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계속되었고 그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술국치 때 수많은 조선인을 고문해서 죽였고 관동대지진 등에서도 지들끼리 선동하여 애먼 조선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종군 위안부, 조선인 강제 노역 문제 등에서도 일본인의 추악함을 볼 수 있었다.
중화민국 역시 난징 대학살, 충칭 대공습 등 현세의 지옥도를 일본군을 통해 겪었다.
일본군과 전쟁을 한 미군도 마닐라 대학살이나 바탄 죽음의 행진 등과 같은 잔혹한 것을 겪은 적이 있다.
동남아시아 또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와 부녀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가 죽지 못해 사는 치욕을 겪었다.
일본제국 군부는 국민을 세뇌해 미영귀축이 먼저 침략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했다.
포로로 잡히면 눈알을 빼고 코와 귀를 벤다고 선동하며 가족을 살리기 위해 참전하라고 전쟁에 동원했다.
거기에 가미카제나 반자이 자살 공격, 일억 총 옥쇄 등을 부르짖으며 많은 백성을 죽게 했다.
일본인의 이러한 국민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서양인은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인을 따로 연구했다는 거 아닌가.
이런 현상은 지금도 남아 일반적인 따돌림과는 다른 이지메 문화라는 게 있다.
일본인 개인은 집단 내에서 얌전하고 예의를 갖추는 듯하나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거나 튀는 사람에 대해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공격하는 묘한 습성이 있다.
물론 모든 일본인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약한 사람을 따돌리는 왕따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개인주의와 더치페이가 당연시되고 있다.
일본인은 우리나라 사람처럼 '우리 짜장으로 통일하자.'는 식이 아니고, 각자 좋아하는 메뉴를 각인각색으로 시켜 먹고 회식이나 가족 모임에서도 더치페이를 한다.
그러나 서양권의 개인주의와는 조금 다른 것이 공동체의 규율을 따르는 게 우선이고, 그 울타리 안에서 서로 간섭하거나 건드리지 않는 개인주의이다.
긴 항해 끝에 외국 항구에 와서 오사케 한잔 걸치니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이 아쉬워 지도거사와 함께 가라오케에 들어갔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손님은 많지 않았는데 한 여인이 '부산코니 카에레'를 간드러지게 부르고 있다.
마이크가 지도거사 앞에 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멋지게 불렀다.
이어 여기저기서 터지는 앙코르 소리...
고베 서민이 어디서 용필이 형이 아닌 원어민이 부르는 '부산항' 라이브 노래를 들어보겠는가.
아마 지금도 지도거사님은 그 가라오케에서 부산항과 불루 라이토 요코하마를 노래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부산코니를 먼저 불렀던 여인과 둘이서 팔장 끼고 나가 해피 라틴호에 돌아오지 않고 아직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다음에 고베 부근에 입항하면, 그 가라오케와 다치노미에 가서 지도거사님이 어드메 다다미를 깔고 누워계시는지 알아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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