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세계 역사를 바꾼 물고기 대구​

부에노(조운엽) 2021. 1. 23. 06:42

 

 

영국 소녀가 잡은 114cm 크기에 15kg이 넘는 대서양 대구

세계 역사를 바꾼 물고기 대구

배가 부산에 들어가면 영도에 있는 형 집에서 묵었다.

어린 조카들 선물 바리바리 싸서 갖다주고 나서 출항할 때까지 총각 혼자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동삼시장 건너편 골목 입구에 대구뽈찜을 파는 집이 보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여준 대구탕을 대구빡까지 쪽쪽 빨아가며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배가 유럽에 들어가면 영국, 네덜란드 같은 곳에서 대구를 많이 실어 종종 먹었다.

대구뽈은 뭐고 찜 맛은 어떨까 해서 가서 먹어봤는데 먹을 만 했다.

대구는 한류성 어종으로 북태평양과 대서양 깊은 바다에서 산다.

큰 놈은 1m 이상 자란다.

몸 자체도 크지만, 머리와 입이 큰 거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름이 대구인 모양이다.

육식성 어류로 입이 큰 만큼 모든 어류, 새우, 게 등 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삼킨다.

심지어 지 새끼도 잡아먹는 식탐 끝판왕이다.

그래서 그런지 알을 한 번에 수백만 개를 낳는다고 한다.

낮에는 수면 근처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밤에는 깊은 바다로 내려간단다.

수명이 30년 정도라니까 한때 북대서양 바다가 대구로 바글바글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서양 사람이 주로 먹는 대서양에서 잡히는 대구와 한국, 일본에서 먹는 태평양 대구는 종이 다르고 대서양 대구가 더 큰 편이다.

시베리아, 만주, 압록강 등지에서는 강물에도 산단다.

대구는 서양인이나 동양 사람이나 다 잘 먹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겨울철에 대구탕을 시원하게 해 먹고, 매콤한 대구 머리 찜을 안주로도 먹는다.

흰 살에 담백하고 고소하며 크기도 커 먹을 게 많다.

포를 떠서 먹든 탕을 끓여서 먹든 육질이 쫄깃하고 맛있다.

제철은 추운 겨울인 11월에서 2월쯤이라고 한다.

다른 계절에도 대구가 잡히기는 하나 맛이 떨어진다.

회로 먹기에는 너무 물컹하여 온갖 생선을 다 회 처먹는 일본인들이 대구는 회로 먹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에선 주로 말려 먹고, 피시 앤드 칩스처럼 튀겨 먹기도 한다.

대구가 흔했던 시절 서, 북유럽에서는 바다의 빵이라고 할 정도로 말린 대구는 거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보존하기 쉬운 데다 흔해서 싸기 때문이다.

곡식을 키울 수 없는 땅에 사는 아이슬란드에서는 정말 밥처럼 먹은 역사가 있단다.

특히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구를 좋아하며 수백 가지의 요리법이 있다고 한다.

지중해권에서도 대구는 맛있는 물고기로 손꼽히며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소금에 절인 대구를 먹고 싶어 하는 수도승 이야기가 나온다.

바이킹 해적이 식량으로 말린 대구를 싣고 다니며 잘 때 베개도 하고 싸울 땐 무기로 썼다는 바다 전설이 있다.

대영제국의 해군이 전 세계 바다를 누빌 수 있었던 게 대구를 충분히 확보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대구는 곡물과 같이 유럽 각 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가야 고분에서 대구 뼈가 나와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먹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문헌에 보면 조선 때에도 대구를 잡아 말리거나 절여서 유통했다고 한다.

어부 출신 작가인 미국의 마크 쿨란스키가 대구에 얽힌 인간의 역사와 각종 에피소드를 모아서 'Cod'라는 책을 냈다.

쿨란스키는 콜럼버스가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 훨씬 전부터 스페인 북서부 바스크 지방의 어민들은 캐나다 서부까지 가서 대구를 잡았다고 말한다.

15세기 유럽 도시들의 자유무역 공동체인 한자동맹이 청어와 대구 어장을 독점하자, 바스크 어민들은 캐나다 뉴펀들랜드까지 가서 대구를 잡아 유럽 시장에 팔았다.

18세기 영국이 미국의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자, 식민지 미국인들은 이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했다.

20세기 영국과 아이슬란드와의 어장 분쟁도 대구 때문에 일어났다.

더욱 많은 대구를 잡기 위해 항해와 어업 기술이 발전했다.

쿨란스키의 말대로 지난 천 년간 세계를 바꾼 물고기였다.

대구는 워낙 찬물을 좋아해서 주로 북쪽 바다에서 잡힌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주 앞바다는 지금도 세계적인 황금어장인데 물 반 대구 반으로 정말 많았다고 한다.

17세기 미국의 시작이었던 1세대 청교도인이 이주한 곳이 바로 보스턴 앞 Cape Cod인데 대구의 영어 이름이 Cod이다.

즉 대구만이라는 지명이 붙을 정도로 대구가 많은 어장이다.

대구는 북아메리카뿐만 아니고 아이슬란드 인근 바다에서도 많이 잡혔다.

그쪽에서도 유럽 어선들이 몰려와 대구를 막 잡아갔다.

이 문제로 또 한 번 사고가 터지게 된다.

19세기까지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는 엄청 춥고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농사도 시원치 않고 별다른 산업도, 자원도 없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지금이야 아주 잘 사는 나라가 됐지만, 그당시 먹고 살길이라고는 고기 잡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럽 어부들이 자기 나라 앞바다 물고기를 다 잡아가니 열 받을 대로 받았다.

20세기 들어 영국, 덴마크 간 체결된 어업 협정에서 아이슬란드의 어업전용 수역을 해안선에서 3해리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 3해리 안에서도 욕심 많은 영국 어선이 자주 들어와 고기를 잡아가는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이에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경비대를 조직한다.

1944년 아이슬란드가 독립하면서 어업 보호를 국가의 절대 명제로 삼았다.

미국은 자국의 해양 유전을 보전하려고 트루먼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대륙붕의 자원은 연안국이 관리한다는 내용으로 그전까지 대륙붕은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었다.

아이슬란드는 어업전관수역을 12해리로 늘렸으며 이 수역 내에는 외국 어선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해양법에 어긋나는 부당 행위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때까지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이 관습적으로 3해리까지를 영해로 인정했는데 이는 당시 대포의 사정거리였다.

그런데도 아이슬란드 정부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영국 정부는 어선단에 군함을 붙여 보냈다.

아이슬란드 경비정과 몇 번의 마찰이 일어나고, 영국은 아이슬란드가 발표한 12해리 어업전관수역을 인정하며 1차 대구 전쟁은 막을 내렸다.

십여 년 뒤 아이슬란드는 어업전관수역을 50해리까지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50해리인 이유는 거기까지가 아이슬란드의 대륙붕이 이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영국은 자국 어선의 어획량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타협책을 내놓았지만, 아이슬란드는 이를 거부한다.

아이슬란드 국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므로 해안경비대는 영국과 서독 트롤 어선들의 어망을 잘랐다.

영국 측은 아이슬란드 경비대에 박치기를 하고, 아이슬란드 경비정은 실탄으로 위협 사격을 하며 포탄을 쏘아대 2차 대구 전쟁이 일어났다.

위기감을 느낀 NATO에서 양국을 조정하여 영국 어선은 50해리 바깥으로 물러났다.

UN 해상법 회의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비롯하여 34개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로 늘리자고 했다.

아이슬란드 정부도 어업전관수역을 200해리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당연히 영국이 반발해 3차 대구 전쟁이 터진다.

영국 어선이 아이슬란드 경비정을 박치기하고 경비정은 포를 쏘고 영국 해군이 다시 나타나 경비정을 받고 난리를 쳤다.

결국 해군력이 달리는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 군함이 나가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고 NATO에서 탈퇴한다고 했다.

미국으로부터 고속정을 몇 척 빌리거나 사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자 소련 호위함을 사겠다고 나섰다.

아이슬란드가 소련에 붙을까 봐 깜짝 놀란 NATO는 또다시 중재에 들어갔다.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이 되면 소련이 폭격기와 잠수함 기지를 설치할까 봐 겁나서다.

얼마 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고 해 핵전쟁 위기까지 있었다.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에 붙으면 북대서양 전체를 소련 영향권에 넣을 수 있는 중요한 중간 거점이 생겨 미국과 NATO의 유럽 방어 작전은 엄청나게 어려워진다.

소련이 유럽을 침공하는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 승자는 소련이라는 말이다.

결국 영국은 군함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제 여론은 배타적 경제수역 200해리가 대세가 되었다.

영국 내부에서도 못 사는 나라에 그깟 대구로 너무 하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가 이기는 거로 끝났다.

전쟁 이후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국교는 정상화되었으나 국민감정은 영국을 적대국으로 여겨 미워하게 되었다.

역사상 전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수백 년간 무적을 자랑하던 대영제국 해군을 꺾었다는 자부심이 크다.

유로 2016에서 국민 수가 40만도 안 되는 아이슬란드가 축구 강국 잉글랜드를 이겼을 때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서양이나 동양이나 대구를 마구 잡아 고기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각 나라에서 남획을 줄이고 치어를 대량으로 방류하며 관리하여 요즘은 다시 대구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영감도 죽기 전에 담백한 대구탕이든 매콤한 대구뽈찜을 원 없이 먹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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