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눈 여인과 뱀 징크스
지바에서 직선거리로 70km쯤 떨어진 카시마항에 입항했을 때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밀을 한배 가득 싣고 와 일본 세 항구에 풀어줄 건데 먼저 그 항구에 입항했다.
배에 자전거가 몇 대 있었다.
배를 부두에 대고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해봤다.
중3 땐가 장충단 공원에서 친구 자전거 꽁무니에 탔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고 겁이 많은 나는 자전거를 멀리했었다.
그런데 외국 항구에서 심심하니 용기를 내 한적한 부두에서 조금씩 타 봤다.
그랬더니 안 넘어지고 자전거가 나가는 거다.
재미가 붙어 밥만 먹으면 부두에서 자전거를 탔다.
조금 자신이 붙어 부두 밖으로 나갈 마음을 먹었다.
그걸 보고 동갑내기 2항사가 '국장님, 조심하셔. 자전거 처음 배우고 지금이 딱 사고 나기 좋을 때요.'라고 걱정을 해주었다.
카시마는 작은 항구 도시라 부두 밖으로 나가니 논과 밭이 천지였다.
포장되지 않은 논길을 혼자 자전거로 달리니 상쾌했다.
바다 위에서 사는 마도로스의 로망은 맨땅 밟는 거 아닌가.
흙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니 이 또한 행복이었다.
가다 보니 풀색 뱀도 보였다.
아~ 나는 뱀 징크스가 있었지...
군대에서 야간 보초를 교대하려고 밤 10시 전에 일팔사 고지 초소로 올라갈 때였다.
달이 밝아 주변이 환했고, 싱그러운 산 공기를 마시며 씩씩대고 올라갔다.
굵은 밧줄 같은 게 오솔길에 가로로 놓여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한쪽 끝이 점점 줄어든다.
어이쿠, 큰 뱀이었다.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제자리에 자빠졌다.
뱀도 놀랐는지 금방 숲으로 사라졌다.
군발이가 그깟 뱀에 놀라다니 전쟁 나면 어쩔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일어나 얼른 보초 교대하러 갔다.
이인 두 시간 보초를 12시에 마치고 내무반으로 내려가다가 고참 심 상병에게 한잔 어떻냐고 물었다.
좋다고 총과 철모를 숲속 잘 안 보이는 데다 숨겨놓고 둘이 철조망을 넘어 망우공원으로 내려갔다.
부추전에 소주 두어 병을 기분 좋게 마시고 부대로 돌아가는데 가도 가도 부대 철조망이 보이지 않는다.
심 상병도 잃어버리고 나 혼자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어스름하게 동이 틀 때쯤 동촌 유원지 절벽에 나 혼자 서있는 것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이 절벽에서 미끄러져 강물에 떨어지면 수영도 못하는데 골로 가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반대 방향 일팔사 고지로 허둥지둥 돌아갔다.
부대에 돌아가니 아침 점호할 시간이 다 됐다.
군복은 흙투성이고 넋 나간 사람처럼 돌아온 나에게 심 상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야, 조 일병! 너 뭐 하다 이제 오냐?"
잃어버린 서너 시간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야, 씨발. 너랑 같이 나갔다가는 영창 가겠다. 다음부턴 나가자는 소리 절대 하지 마라우."
중국 작은 항구에서 상륙 나가 시골길을 걸었다.
비포장도로에 흙먼지도 나고 전형적인 시골 농촌 풍경에 기분이 좋았다.
추수가 끝나고 쌀쌀한 날씨에 논 옆에 얕고 넓은 물웅덩이가 보였다.
손바닥보다 훨씬 큰 검은 민물조개가 여러 마리 보였다.
'와~ 중국은 땅이 넓으니 조개도 엄청나게 크네. 미꾸라지도 뱀장어같이 크더니만. 근데 저걸 안 잡아먹고 뭐 하지?' 하며 신기하게 쳐다본 기억이 난다.
도로가 옆에는 몇 개의 무덤과 고인의 이름을 적은 긴 나무막대기에 검은 삼각 천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느 작은 무덤 앞에 단발머리를 한 예쁜 중국 소녀 사진이 놓여있었다.
아깝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모양이지.
그런데 묘지 사이로 뱀 한 마리가 지나간다.
아직 동면에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하며 천천히 가던 길을 걸었다.
세 갈래 길 커브에서 좌우를 둘러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길을 건너는데 보이지 않던 트럭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받아버렸다.
잠시 정신줄을 놓고 누워 있었나 보다.
'아, 뭐야?'라고 혼잣말을 하며 정신 차려 보니 트럭 기사와 한 단발머리 소녀가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살짝 부딪혀서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 같고 넘어지면서 손으로 땅을 짚었는지 손목이 좀 아팠다.
한국 같으면 병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자는 등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촌구석에서 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별 탈 없으면 그냥 가야지...
툴툴 털고 일어나 괜찮다고 인사하고 가는 데 흘낏 본 예쁘장한 그 소녀 얼굴이 잿빛처럼 창백하고 눈은 불그스름한 거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해서 조금 가다가 뒤를 돌아다 봤다.
소녀는 그새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트럭 기사와 무덤만이 덩그러니 있고 찬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고 있었다.
카시마에서 조금 높은 언덕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을 때 멀리 보이는 우리 배 연돌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와 함께 뱃고동을 길게 울리는 게 들린다.
하역을 마치고 출항하려고 엔진 시동을 걸면서 선원들 돌아오라는 신호였다.
서둘러 배에 돌아가려고 개울 옆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가운데 움푹 팬 게 보였다.
저기서 튀면 엉덩이가 아플 거 같아 어어~ 하다가 정말 튀어 다리 난간에 부딪히며 자전거와 함께 개울물에 처박혔다.
"아, 또 뭐야..."
얕은 개울물에 퍼져있으니 마침 지나가던 트럭이 쫓아와서 건져주었다.
친절한 일본 젊은이가 배까지 태워주었다.
그런데 같이 타고 있는 모친인 듯한 말 없는 여인은 산발한 머리에 이가 거의 빠졌는지 다물어지지 않는 입 사이로 검은 이 몇 개만 보이고 표정이 없었다.
눈 색도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카시마에서 아픈 다리를 끌고 출항하여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병원에 갔다.
개울에 떨어질 때 난간에 부딪혀 무릎뼈에 금이 간 모양이다.
아프긴 한데 뼈가 부러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서 깁스를 하고 한 항차를 더 하다가 흔들리는 배 안에서 목발 짚고 다니는 게 불편해서 직무 외 상병으로 귀국했다.
참,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뱀띠 여인과의 인연이 나쁜 편도 아니었다.
평생 살아있는 뱀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왜 난 뱀만 보고 나면 사고가 나지.
그리고 그때 만난 구세주같은 여인들이 왜 표정도 없고 눈빛이 빨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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