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청해진
근대에 바다를 지배한 자로 유럽에는 콜럼버스, 중국에는 정화가 있었다.
그전에 우리나라에는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당나라에서 군인을 했다가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대사로 당시 한중일 사이의 바다를 지배하며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장보고의 힘은 막강하여 신라 왕실과 중국, 일본에까지 영향력이 미칠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인 중 유일하게 한중일 정사 역사서에 모두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중국 산둥의 법화원에는 장보고 동상과 기념관이 있다.
일본 교토에도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비석과 영정 그림이 있다.
한중일 삼국 모두 기념하는 한국인은 역사 이래로 장보고가 유일할 것이다.
신라의 골품제도 아래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당나라에 가서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이라는 집단 거주지가 있었고, 당은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기용하는 등 외국인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이민족 출신으로 절도사까지 올라간 안녹산 장군은 이란계라고 한다.
당나라 군대에 들어간 장보고는 말을 잘 타고 창을 잘 써 장교가 되었다.
이 시기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 자세한 행적은 알 수가 없으나 이십 년 넘게 당나라 장교를 하면서 국제 무역업에 종사한 모양이다.
당시 중국 해안에는 해적이 들끓어 당나라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장보고는 이 해적 때문에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당나라에서 귀국했던 장보고에게 흥덕왕이 대사라는 특별 관직과 군사를 주고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서남해안을 관리하게 했다.
아무튼 해적 소탕을 많이 해 삼국사기에는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거의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야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세력으로 커졌다.
장보고는 산둥반도에 절을 만들어 신라, 일본의 승려가 지나가는 길에 머물게 했다.
일본 스님의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장보고가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선원에 있다고 한다.
그의 행적과 명성이 한중일을 넘나드는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이렇게 청해진에서 해적을 물리치며 교역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던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족 신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와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었다는 것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평민 출신인 장보고의 군대가 부당한 왕에 대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바꾼 것이다.
그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이 신무왕이 병으로 긍방 죽어 지켜지지 않았다.
문성왕도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려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단다.
장보고를 '천하디천한 바다 섬 놈'이라고 까면서 그런 그의 딸이 왕비 감이 될 수 없다고 제동을 걸었다.
열 받은 장보고가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진골 귀족이 장이 반란 의사가 있다고 얽어 암살한다.
이것에 대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일본 기록이 다 다른데 아무튼 청해진이 혼란해지고 와해한 것은 틀림없었다.
이때 청해진 사람들이 당나라와 일본으로 많이 망명하여 장보고의 부재가 알려졌다고 한다.
그 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며 남은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청해진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장보고가 남긴 영향은 컸다.
학계에서는 장보고와 청해진이 후대 한국사에 남긴 영향으로 중국 도자기 기술의 도입과 불교 선종의 국내 확산을 말한다.
우선 장보고가 교역했던 중국의 자기를 신라인들도 만든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중국 자기의 제작 기술을 배워서 그곳에서 자체 생산해 다시 수출하였다.
이때 배운 기술이 훗날 고려청자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신라에 선종이 들어오게 된 것도 당시 장보고가 해적을 쫓아내고 승려들이 당으로 유학 갔다 오는 항로를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당대 선종 사상의 전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보고는 후대의 한국 역사의 흐름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 셈이다.
장보고는 이미 당대에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나라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두목은 자신의 '번천문집'에서 장보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장보고를 안녹산의 난 때 활약한 장수를 언급하며, 명철한 두뇌를 가지고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장보고를 '반역자 열전'이 아닌 '명장 열전'에 실었다고 한다.
일본의 엔닌 스님은 자신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때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왔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즉, 장보고는 현대에 띄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신라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다.
확실한 사실은 고려에서도 장보고를 명장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왕이 자기를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맞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썼다.
그리고 신무왕을 만드는 데 일조한 공신인데 공을 생각해서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았냐고 했다.
후에 장흥, 보성, 고흥의 약어로 '장보고'라고 했단다.
대한민국 해군의 첫 잠수함에 '장보고함'이라고 명명해 그를 기렸다.
우리나라의 제2 남극 과학기지의 이름도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로 칭했다.
장보고 대사를 생각할 때마다 아쉬운 것은 그때 눈을 조금만 돌려 아메리카, 호주는 아니더라도 하이난, 보루네오 정도에 청해진 지사를 두어 관리했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엄청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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