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고래 이야기 II

부에노(조운엽) 2021. 3. 31. 05:44

 

 

캘리포니아 해안을 지나가는 유조선 근처에서 헤엄치는 거대한 긴수염고래

고래 이야기 II

고래의 귀지로 고래의 생활사와 지구 환경변화를 알 수 있다.

대왕고래는 여름 동안 극지방에서 배불리 먹은 뒤 나머지 반년은 따뜻한 바다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며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6개월 주기의 생활 흔적은 귀의 분비물이 돌처럼 굳은 귀지에 나이테처럼 남는다.

물고기의 머릿속에도 귀돌이라는 작은 평형기관이 있어 그 안에는 나이테같이 물고기가 살던 환경과 정보가 담겨있다고 한다.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어서 귀돌은 없지만, 대신 거대한 귀지가 그 역할을 한다.

미국의 해양 과학자들은 배와 충돌해 죽은 12살짜리 20여m 길이의 수컷 대왕고래에서 염소 뿔처럼 생긴 귀지를 빼 분석했다.

과학자들은 이 고래의 귀지에 포함된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급증한 때가 포경이 왕성한 시기와 일치하는 걸 알게 됐다.

조사 대상도 대왕고래와 참고래, 혹등고래 등 3종 20여 마리로 넓혔다.

이들 고래가 태어난 19세기부터 최근 150여 년 동안 상업 포경, 이차 대전과 수온이 올라갔을 때 고래가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대왕고래는 포경, 선박 소음, 선박과의 충돌 위험 등으로 스트레스가 매우 늘었다.

포경이 늘어나면 고래의 호르몬 수준도 비슷하게 높아졌다.

1960년대 상업 포경이 성행할 때 고래의 호르몬 수치도 최고치였다.

이차 대전 때 상업 포경은 줄었지만, 고래 몸 안의 호르몬 수치는 오히려 늘어났다.

전쟁 중에 고래잡이는 줄었으나 비행기와 군함, 잠수함의 전투와 수중 폭발로 고래의 스트레스 호르몬은 늘었다.

대형 고래에 대한 포경이 중단된 1970년대에 호르몬 수준은 최저치로 떨어졌다.

농약과 중금속 성분이 고래가 태어난 첫해에 귀지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미 고래의 몸에서 배출되지 않은 유기물질이 모유로 새끼에게 전해진 것이다.

최근 들어서 고래의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증가해 1960년대 포경 전성기 수준에 가까워졌다.

그 이유는 늘어난 선박이 일으키는 해양 소음과 양식장 그물, 기후 변화로 해수 온도 상승 등에 스트레스를 받은 거로 추정된다.

연구팀은 만성 스트레스는 번식 능력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젠 우리 모두 다 알듯이 인간에게도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다.

지상에서 제일 큰 동물인 대왕고래는 갓 태어난 새끼도 길이 7m에 무게가 2t이 넘는다.

대왕고래는 바다 표면에서 오 분 정도 머물면서 십여 차례 호흡하고 200여m까지 잠수해 20여 분 동안 돌진 사냥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산소 소비를 줄이기 위해 심장 박동수를 분당 2회까지 줄인단다.

북태평양의 성숙한 젊은 대왕고래는 길이 20m에 무게는 70t을 훌쩍 넘긴다.

대왕고래가 이처럼 큰 몸집으로 잠수하기 위해 생리적 한계까지 심장 박동을 조절한다는 이야기다.

크릴 떼 등을 먹기 위해 잠수할 때는 산소 소비를 줄이기 위해 극단적으로 심장 박동을 늦춘다.

반대로 바다 표면에 떠오르면 열 배 이상 심박 수를 늘려 부족한 산소를 얼른 보충하고 다시 잠수하는 행동을 되풀이한다.

먹이 사냥은 깊이 잠수한 뒤 입을 크게 벌려 위쪽 먹이 떼를 향해 전속으로 돌진해 엄청난 먹이와 물을 한꺼번에 수십t 삼킨다.

이후 수염 사이로 물을 빼내면서 서서히 깊은 곳으로 잠수해 다시 급가속하는 사냥에 나선다.

문제는 산소가 많이 필요한 급가속 사냥 때 산소를 흡입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그 비밀을 ‘대동맥 활’이라는 기관에서 알았다.

풍선처럼 탄력이 강한 이 기관은 혈류를 조절해서 심장에서 나오는 대량의 피를 보관했다가 필요한 장기에 서서히 보낸다.

일반적으로 포유류는 작은 개체나 큰 놈이나 마찬가지로 평생 심장이 15억 번쯤 뛴다고 한다.

그래서 분당 천 번을 뛰는 쥐처럼 작은 동물은 수명이 짧고, 분당 삼십 회 정도인 코끼리 같은 큰 동물은 장수한다.

사람은 분당 팔십 회 정도인데 의료와 보건, 영양 덕에 장수한다.

대왕고래도 백 년을 넘게 산단다.

사냥을 마치고 수면에 나온 대왕고래는 그냥 쉬는 게 아니다.

심박 수는 잠수 때의 열 배 이상인 분당 삼십여 회로 치솟는다.

사냥 때 얼추 다 쓴 산소를 빨리 보충하기 위해 최대 속도로 심장이 뛰는 것이다.

영장류와 함께 두뇌가 크고 사회생활을 하는 고래는 대표적으로 강력한 모계사회를 이루는 동물이다.

암컷 중심으로 무리가 움직이고, 새끼에게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친다.

왜 암컷이 고래 사회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

영국 해양 과학자들은 고래의 모계사회 기원을 육지에서 바다로 간 고래의 조상에서 추정했다.

사천만 년 전 바다로 간 육지 포유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적응해야 했다.

땅 위에 살다 바다로 가니 이동이 훨씬 쉽고 먹이가 천지에 널려 있었다.

먹이 때문에 피 터지게 싸울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바다 환경은 더운피 동물인 고래에게 체온 유지라는 큰 숙제를 안겼다.

수염고래는 여름 동안 플랑크톤과 크릴이 번성하는 극지방 바다에서 엄청난 먹이를 먹어 지방으로 비축하여 몸을 불린다.

그리고 나머지 반년은 안 먹는 쪽으로 적응했다.

이빨고래는 레이다처럼 초음파를 쏴 반사파로 먹이의 위치를 파악하여 효율적으로 사냥하는 방법을 알았다.

문제는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기르는 일이다.

연구자들은 다른 모든 포유류처럼 고래도 암컷이 임신, 수유, 양육 등 번식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고래 수컷은 교미 후 그걸로 땡이지 양육을 돕지 않는다고 한다.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동물 중 하나인 대왕고래는 새끼의 빠른 성장을 위해 지방이 많은 모유를 하루 이백kl 넘게 먹인다.

새끼가 바다에서 체온을 잃어 죽지 않으려면 빨리 지방층을 쌓아야 한다.

어미에겐 엄청난 부담이다.

수염고래 어미는 수유 중 굶으며 축적된 지방을 태워 젖을 만들어 새끼에게 먹인다.

깊이 잠수해 대왕오징어 등을 잡아먹고 사는 향고래는 어미가 식사하러 가면 무리가 새끼를 대신 봐준다.

젖을 뗀 새끼 고래를 돌보는 일도 어미 몫이다.

대왕고래 새끼는 태어난 해 어미를 따라 따뜻한 바다에서 극지방까지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 어미가 가르쳐 준 경로를 익혀 평생 되풀이한다.

이동 지식뿐 아니라 사냥 기술도 어미를 통해 전수된다.

대왕고래나 혹등고래가 따뜻한 바다로 새끼를 낳기 위해 올 때나 새끼 낳고 돌아갈 때도 먹이를 먹지 않아 많이 약해진 상태이다.

이때 몸집이 훨씬 작은 백상아리나 범고래가 약한 고래 개체나 새끼를 공격하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지방 덩어리의 유혹이 큰 모양이다.

수십t 하는 덩치를 물 위로 솟구치는 굉장한 힘을 가진 고래의 지느러미나 꼬리에 한 방 맞으면 상어나 범고래도 바로 가는 거지.

새끼를 상어에 잃거나 자신이 공격당해본 경험이 있는 거대한 혹등고래가 친절하게 사람이나 물개를 식인상어로부터 구해준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고래나 북극곰도 잡아먹는 바다 최고의 포식자 범고래가 인간은 공격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조용했던 바다에 사람이 다시 나타나자 지중해 범고래가 사람이 탄 배를 공격하는 사례가 잇달아 보도된다.

아마 범고래의 주식 중 하나인 참치를 인간이 너무 많이 잡아 먹이가 부족해서 그런 모양이다.

게다가 사람이 쳐놓은 그물이나 배에 동족들이 희생당하는 걸 종종 봐 극도의 스트레스로 그런 게 아니냐는 전문가의 말이다.

과학자들은 새끼를 기르는 힘겨운 과정에서 책임을 떠맡은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관계는 고래 사회의 주춧돌이라고 말한다.

냉혹한 환경에서 암컷끼리의 혈연과 연대가 협동 사냥과 공동 방어, 정보 공유 등으로 무리의 생존능력을 높여준다고 밝혔다.

대형 이빨고래 종에서는 전형적으로 암컷이 무리를 지배한다.

향고래 수컷은 십 대 초에 무리를 떠나고 다양한 암컷끼리 수십 년간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구조를 이뤄 공동육아 등을 해나간다.

범고래도 모계 혈연관계가 사회를 지탱한다.

연어를 잡아먹는 범고래 집단에서는 먹이가 부족할 때 나이 든 암컷의 경험이 집단의 생존을 좌지우지한다.

범고래 등 일부 고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포유류에서 유일하게 아직 생식능력이 있는 암컷이 폐경 한다.

나이 든 암컷은 생식을 젊은 암컷에게 넘기고 새끼를 돌보는 것으로 무리에 기여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호주 샤크만의 큰돌고래는 어미가 새끼 가운데 암놈과 유독 강한 유대를 맺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돌고래 어미는 바로 옆에서 헤엄치는 새끼를 생각해 자신의 잠수 시간을 줄이는데, 그런 배려는 새끼 암컷한테만 나타났다.

또, 사냥기술을 전수할 때도 수놈보다 암컷 새끼에 더 많은 기회를 준다.

고래 사회에서는 수컷이 종족 보존을 위한 거사에만 암놈에게 봉사하고 언제나 왕따당한다는 이야기다.

타이만의 하구 부근에 사는 브라이드고래는 사냥법이 특이하다.

이 해역의 브라이드고래는 바다 표면에 입을 벌리고 물고기가 들어오길 기다리다가 고기가 들어오면 입을 닫아 삼킨다.

마치 우리 어릴 때 감나무 아래 누워 입 벌리고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식이다.

희한하게도 입만 벌리면 고기가 들어온단다.

연구자들은 브라이드고래가 수면 가까이 입을 벌리면 주변 멸치 떼가 이상하게 방향감각을 잃고 입 고랑 사이로 흘러드는 물살에 쓸려 입속으로 들어간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이유는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 인간도 그 기술을 배우면, 소주와 초장만 먹고 바다에 뛰어들어 입만 벌리고 있으면 맛있는 안주가 해결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