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중인 유조선
마지막 상륙 작전, 광양 '맛있는 호도과자' 이야기
두 번째 상륙 작전은 어떻게 했을까?
십 오륙 년에서 이십여 년 전 일을 기억하며 쓰다 보니 전후가 약간 헷갈리기도 한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호도과자 장사하는 것까지 이어가 보자.
80년 대 초에 나를 무쟈게 예뻐하시던 촌에 사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몇 년째 빈 집과 빈 땅으로 방치되어 안타까워하던 부모님이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거기 내려가서 멧돼지를 키운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전에 같이 군대 생활하며 모시고 있던 전 육군 참모총장 민기식 장군님이 강원도에서 돼지를 키워 성공했다는 걸 아는 우리 가족들은 모두 환영했다.
내가 배를 타서 번 돈들을 그 멧돼지가 제법 먹어 치웠는데 당시 유통이 잘 안 돼 키우기만 했지 돈이 안 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내와 나는 멧돼지 식당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총각 때 배를 타는 것은 참 매력적이었다.
국내 월급쟁이 중 1프로 안에 드는 고임금을 받으면서 차비와 숙식비 걱정 안 하고 세계 곳곳을 구경다니며, 가는 곳마다 현지 예쁜 아가씨들과 로맨스를 만들어갔지만 결혼하고 나니 그것도 시들해졌고 어떡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육상에서 정착할 것인가가 화두였다.
그래서 아무 경험 없이 시작한 멧돼지 가든은 아버님이 고기를 대주시고 어머님이 요리를 해주셔서 비교적 안정되게 자리를 잡아갔다.
아내와 나는 온갖 식당 뒤치다꺼리를 하면서도 매일 살을 맞대고 깨가 쏟아지듯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전에 같이 타던 Tokyo Marine 탱커의 일본인 캡틴이 식당 자리가 잡혔으면 가족들에게 맡겨놓고 배를 타서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라는 연락이 왔다.
내가 빠지면 식당이 돌아가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식구들은 사람 두 명 더 써도 배에서 버는 것이 훨씬 더 많은데 은근히 승선할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내 깐에는 몸 안 아끼고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사실 자리 잡힌 식당에서 남자 주인이 하는 일이란 것이 티도 안 나고 별 거 있겠는가?
나도 고달프게 식당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슬금슬금 다시 바다 내음이 맡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바다로 나갔다.
2차 상륙작전 마스 오 메노스.
한 바다에 누워 시간을 죽이는 동안 세월이 흘러 아내는 식당을 정리하고 세 살 때까지 살았다던 광양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내가 타던 십만 톤급 미국 유조선에서 자매선 43척 중에서 통신비를 가장 많이 절감해주어 선주가 돈 천 불인가 격려금을 준 일이 있었다.
그 때 생각하길 역시 구멍가게를 해도 내가 오너를 해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프로페셔널 통신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내가 노력해서 연간 돈 만 불을 절감해주었는데 고작 돈 천 불이라니...
물론 다른 나라 선주 같으면 그것도 없겠지만.
그래서 하릴없이 배에서 만 날 생각하길, 뭔 일을 해서 육상에 정착할까 궁리하다가 광양에 대학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락 카페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배를 내렸다.
허허벌판인 광양 전문 대학과 한려 대학 앞.
건물 하나 달랑 있는 곳을 찾아가 건물주를 수소문해서 임대 이야기를 하던중 어느 날 건물이 팔렸다고 했다.
닭 쫓던 개 모양 다른 걸 알아봐야 했다.
그래서 순천 대학교 앞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알아 보다가 아이 엄마가 호도과자를 사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던중에 나보고 저걸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큰 화물선에서 고급 사관을 하던 사람이 저걸 어떻게 하느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사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고 늘 생각해 왔던 사람이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인데 뭘 못하겠냐 하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쪽 팔릴 일도 없었다.
난 복잡한 것을 싫어해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는 것이 약하다.
생각해서 됐다 싶으면 바로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지난 일은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에만 집중한다.
기계를 주문하고 트럭을 뽑았다.
그 동안 반죽하는 방법을 돈 주고 배웠다.
아크릴에 '맛있는 호도과자'라고 예쁘게 박아 차에 걸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딱 석 달 열흘을 했다.
그 동안 사 놓은 작은 아파트 두 채 대출금 이자와 작은 차 두 대를 굴리면서 소소하게 보험료 나가는 것과 세 식구 잘 먹고 살다가 호도과자 장사를 그만 둘 때 통장을 보니 딱 천만 원이 남았다.
당시 동광양 신도시 21평 주공 아파트가 이천만 원 정도 했었나?
호도과자 장사할 때 에피소드 하나.
아빠가 그 장사하기 전에는 여행가다 어쩌다 호도과자를 사주면 아주 좋아하던 아이가 처음에는 팔다 남은 호도과자를 집에 가져가면 잘 먹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질려서인지 손도 대지 않더라.
그래서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이 키우는 개에게 던져주었더니 환장하고 게걸스럽게 먹더만.
닭 알도 아주 많이 넣어서 만든 거라...
한 일주일 주고 나니 조금만 먹고 나머지는 다음에 먹으려는지 땅에 묻더만.
그러더니 나중에는 바닥에 굴러다녀도 쳐다보지도 않는 거 있지.
그래서 생긴 요령이 호도과자 불 끄고 퇴근할 무렵에 남은 호도과자를 세일해봤다.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살까 말까 망설이며 내 차 옆을 지날 때 '한 봉지 천 원 짜리, 세 봉지 이천 원!' 하고 소리치면 가던 길 돌아와 '정말이에요? 사천 원어치 주세요.'라며 더 사가더라.
물론 난 더 후하게 담아주고...
남은 거 갖고 가봐야 개도 안 먹는데... ㅋㅋㅋ
그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고 육상에 정착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동안 한국에서 먹는 장사를 직간접적으로 열너댓 번을 운영해봤고, 주류 유통을 오랫동안 하면서 혼자 하루 2,700만 원어치도 팔아 보고 한 달에 돈 천만 원 이상도 벌어봤지만 호도과자 장사할 때가 가장 실속이 있었던 것 같다.
세금도 없고, 나가는 것 별로 없이, 팔면 파는 대로 다 남다시피 했으니까 말이다.
글쓴이가 DAUM 세계엔n 라틴방에 애정을 갖고 쓴 항해일지 애독자이던 해군 중위 출신인 비비킹 님이 두어 달 전에 14만 톤급 광석선에 3항사로 나간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이 글 보고 호도과자 장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생기면 어쩌나.
내가 다시 호도과자 장사할 일 있겠나 해서 갖고 있던 반죽 레시피를 오래 전에 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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