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은퇴 이민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의 한인 사회

부에노(조운엽) 2016. 12. 17. 09:06




코타키나발루 전경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의 한인 사회




그동안 많은 한인이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루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지속해서 늘고 있다.

그렇다면 말레이시아에 한인이 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대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미 1900년대 초에 말레이시아에 들어와 사신 분의 이야기가 '한국을 빛낸 분!'으로 국내 일간지에 기사로 나왔고 그의 후손이 스크랩해 놓은 것을 십여 년 전에 본 적이 있다.


1900년대 초에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한 젊은이가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임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찾던 중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산림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외국인을 찾는 공고를 보고 산림청 공무원으로 산타칸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2차 대전 말에 일본군이 말레이시아에 약 삼 년 동안 주둔하다가 패전하여 일본으로 철수할 때 배에 그 젊은이를 태우고 갔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다만, 그가 현지인과 결혼하여 생긴 자녀들의 후손이 지금도 이곳과 더불어 조호바루와 싱가포르 등지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형님을 그렇게 보내고 늘 안타까워하던 동생 김선규 옹은 형님을 찾아 1969년에 이곳 사바로 오게 되었는데 형님과 함께 일하던 현지인들의 증언으로 형님이 철수하는 일본군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까지 찾아가 수소문해 보았지만, 당시 배에 탔던 일본인들조차도 그가 분명 배에 타기는 했는데 일본에 도착하여 내릴 때는 못 봤다는 말만을 듣고 끝내 형님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쉬워하는 김 옹에게 형님의 도움을 받았거나 친하게 지냈던 현지인들이 '우리가 도와줄 테니 이곳에서 같이 살자'라고 권하여 그때부터 이곳에 살게 되었는데 60년대 후반인 당시에는 이미 의사 등 다른 한국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1960년 후반에 말레이시아 정부에서는 의사가 부족하자 한국 정부에 의사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한국 정부에서는 공고하여 선발한 의사를 말레이시아로 보내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40여 명의 의사가 말레이시아 정부의 특별 대우를 받고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집 한 채와 차, 그리고 적지 않은 봉급을 받았다는 말을 그 당시에 말레이시아에 근무했던 의사에게 15년 전에 직접 들었다.

그때가 바로 김 옹이 산타칸에 정착하여 살던 때로 그때 함께 살던 한인 중에 의사도 있었다는 말이 바로 말레이시아 정부의 초청을 받은 그 한인 의사 중 한 분이 아닌가 한다.


그 후 한국은 새마을 운동과 5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하여 잘살게 되었고, 산업화 과정에서 필요한 원목들이 1980년대에 이곳 보르네오 섬 산타칸과 타와우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어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 운동장처럼 널려 있었다.

그 당시 규모가 큰 원목 회사들은 사원들을 이곳에 파견하였는데 그때 남은 분들이 지금까지 산타칸, 타와우와 이곳 코타키나발루에 삼십여 년째 살고 계시는 한인 원로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타와우에 있는 합판 회사들에 투자하거나 독립적으로 합판 회사를 설립하여 지금까지도 운영하는 회사도 있는데 지역에 나름대로 공헌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때쯤 김 옹은 한국에 있던 아들을 불러 나무 사업을 하게 하였는데 지금 그 아들 부부만 타와우에 산다.


하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건축자재가 나무에서 철근이나 알루미늄, 기타 플라스틱 자재로 대체되고, 말레이시아의 인건비가 급속도로 오르면서 인도네시아나 한국과 가까운 시베리아의 원목과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되자 원목 사업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자 산타칸과 타와우 지역에서 원목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떠났다.

그리고 사바의 주 수도였던 산타칸은 코타키나발루에 주도의 자리를 내주었고 남은 한인들이 코타키나발루로 모이게 되었다.

더구나 말레이시아 항공이 쿠알라룸푸르에서 출발하여 코타키나발루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개설함에 따라 이곳에 사는 한인들이 200여 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동남아에서 제일 높은 사천 미터가 넘는 코타키나발루 산



그러다가 2000년대 초에 인도네시아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쓰나미가 인도양 주변 국가들을 강타하여 특히, 인도네시아와 태국의 유명 관광지들을 초토화했고 인도네시아와 태국 관광지에서 관광업을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위기에 처하게 되자 급히 대안 관광지를 찾아 개발한 곳이 코타키나발루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조용한 항구 도시로 당시에 200여 명 정도 살던 한인 가족이나 친구들이 가끔 여행 오는 곳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여행사들의 집중적인 홍보에 점차 소문이 나면서 여행객들이 몰려오고 항공편도 주 1편에서 말레이시아 항공을 비롯하여 대한 항공, 아시아나 항공과 저가 항공사들까지 뛰어들어 최대 주 15편도 모자라 성수기에는 전세기까지 띄워도 자리가 없어서 못 오는 곳이 되었다.


이렇게 여행객들이 몰려오면서 세 부류의 한인들이 코타키나발루에 살게 되었다.

그 첫 번째로는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사업을 하던 여행사와 가이드들로, 성수기가 되어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면 백여 명의 가이드들이 입국장 앞에서 바글바글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게 예사로 되었다.

두 번째로는 현지에서 아이를 공부시키는 기러기 가족들로 코타키나발루 한인들의 문화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은퇴하신 분들이 말년을 보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서 슈퍼마켓, 선물 가게 등도 늘어났고 한인 음식점이 스무 곳이나 생기고, 다른 사업들도 차차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한인들의 취업 기회도 생기게 되고 한인사회는 십여 년 만에 참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이렇듯 코타키나발루의 한인들이 1,500여 명까지 증가하였다가 2010년 말에 환율 파동으로 한인들의 수가 하루아침에 절반으로 줄기도 했다.


코타키나발루는 이제 다시 한국에 주목받는 곳이 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오시는 분들을 이모저모로 돕기 위하여 만들어진 인터넷 다음 카페인 '내 사랑 코타키나발루!'나 '코타키나발루의 모든 것!' 등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이제 앞으로 이곳에 한인들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한인들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일본인이나 중국 이민 사회처럼 한인들 간에 좋은 분위기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행복한 곳!'이 되는 것이다.

이미 이곳에 먼저 와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분들이 새로 온 사람들을 도우며 이끌어가는 한인사회가 된다면, 코타키나발루는 한인들의 즐거운 삶의 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현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가 저들에게 할 수 있는 작은 봉사를 하면서 살면, 코타키나발루 한인들은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현지인들에게도 사랑받을 것이다.



코타키나발루의 모든 것 http://cafe.daum.net/KKhomest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