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프춤번(캄보디아 추석) 때 고향 스와이 리응에서 활짝 웃는 짠다 씨
프놈펜에서 공장 명의
캄보디아인 명의로 운영하는 작은 봉제 공장에는 소방 공무원 외에 다른 공무원들이 잘 나타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다.
저임금 영세 사업장에서 힘들게 먹고 사는데 같은 현지인끼리 뜯어가기 미안할 것 같다.
그런데 외국인 명의로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출입국 관리소 직원과 관할 경찰, 공무원들이 수시로 나와 트집을 잡고 금전을 요구하며 흥정한다.
마치 교통경찰이 운전면허 없는 사람을 단속하고 무면허보다는 삥땅 액수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 우리는 공장 명의를 현지인으로 하려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식구가 나보고 우리 직원 중 믿을만한 사람과 살림을 차리고 공장을 같이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죄송한 말이지만, 사랑보다는 공장 명의가 필요한 것이다.
솔직히 나는 별 마음은 없었지만, 남의 나라 살면서 과히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 삼사 년 전에 라인 반장을 통해 한국인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 짠다 씨를 점찍었다.
몇 년 같이 일하면서 서로 정이 많이 들었고 리더로서는 약하지만, 봉제 기술은 캄보디아에서 최고 중 한 명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새 공장 명의를 그녀 앞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흔쾌히 승낙했다.
연휴에 그녀 고향 스와이 리응에 같이 가 아버님과 친척, 아이들을 만나 인사하고 하루를 지내고 왔다.
프놈펜에 돌아와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니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미적거렸다.
객공 일을 하면서 직원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같은 캄보디아 사람인 그녀보고 해결하라고 전화를 넘겨주니 너무 성의 없이 일 처리 하는 걸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공장에서 봉지 밥 같이 먹던 인연 위 씨
일단 말이 나온 것은 마무리해야 하니 다른 직원을 물색했다.
몇 년 전 통역을 데리고 와 나랑 살고 싶다고 말했으나 애인은 해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흐지부지됐던 위 씨에게 의사 타진을 했다.
그때 그거 아직 유효하냐고 물어보니 좋다고 했다.
내가 매달 부모님 생활비를 보내줄 테니 나와서 우리 집에서 살면서 공장을 같이 하자고 하니 서로 사랑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말했던 그녀가 집에 갔다 오더니 태도가 돌변했다.
부모님 집 얻어주고, 매달 생활비를 따로 보내주고, 가족, 친지와 동네 사람 모시고 결혼식과 피로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초혼도 아니고 애 딸린 삼십 대 아줌마 구제해서 공장 차려준다는 데 뭘 요구하는 게 그리 많아?
우리나라와 달리 캄보디아에선 여자 나이 이십 대 중후반이 넘으면 대부분 학부형이 되어 고물 취급한다.
그리고 애초에 본인 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주위 사람이 이것저것 요구 조건을 보태 파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직 인연이 아닌가 싶어 그냥 공장을 가동하기로 했다.
그동안 경험으로 아직은 관계 공무원이 나와서 트집 잡으면 몇 푼 집어주면 되는 일이니...
그리고 그녀들은 지금도 나와 만나면 농담하고 장난치며 일당 직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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